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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기타

불레즈와 아르농쿠르, 너무 달랐지만, 생각보다 비슷했던 그들.

by Chaillyboy 2016. 4. 1.

불레즈와 아르농쿠르, 너무 달랐지만, 생각보다 비슷했던 그들

- NYT, 데이비드 알렌 2016년 03월 18일

 

 

전후(戰後) 시대 그 자체가 죽어버린 것 같다. 두 달 동안, 피에르 불레즈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어느 누구보다 지난 반 세기동안 클래식 음악을 재정의한 아방가르드 - 가 죽었다. 

  

 

그들은 확실히 대조된다. 1월 5일에 세상을 떠난 불레즈는 1925년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귀한 모더니즘의 지도자가 되어 포디움의 정밀한 음향-조각가로서 요란하게 (특정 조류의) 동시대 작품을 옹호했는데, 여기엔 음향과 구조에 대한 그의 선구적인 실험도 포함된다.

  

3월 5일에 세상을 떠난 아르농쿠르는 1929년 왕족 가문의 아들 - 라 퐁텐과 용맹한 아르농쿠르가의 요한 니콜라우스 백작[각주:1] - 로 태어났다. 그는 바르톡과 베르크 이후의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대신 원전 악기와 역사에 근거한 연주법의 일반화를 이끌었고, 그것들은 이제 고전 레퍼토리의 표준이 되었다.

 

아르농쿠르는 리허설에서 강의한다; 불레즈는 한 마디를 겨우 말한다. 아르농쿠르의 지휘는 사실상 박자를 무시한다. 불레즈의 박자는 흠이 없다. 아르농쿠르의 레퍼토리는  불레즈와 거의 반대된다. 가끔 두 사람의 레퍼토리가 겹칠 땐, 하이든과 브루크너에서 그랬는데,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선호보다 더 많은 유사점을 그려볼 수 있다. 어쨌든, 불레즈와 긴밀하게 작업하고 아르농쿠르와는 베토벤과 드보르작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피에르 로랑 에마르는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둘은 같은 세계에 속해요, 비록 다른 부분에 산다 해도 말이죠."

 

두 사람 모두 기쁨에 들떠 가장자리를 맡았다. 숨막히는 전통을 없에는 걸 추구했다. 보수적인 제도에 맞섰고, 이를 위해 악단을 새로 만들었다.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한 작품을 옹호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중심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들의 목표를 위해 한 때 성장했던 녹음산업의 동력과 함께 했다: 불레즈는 베베른의 전곡을, 아르농쿠르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를 녹음했다.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했다, 비록 불레즈가 런던과 뉴욕의 음악감독으로서 타협했고, 아르농쿠르는 기존의 교향악단과 작업했지만 말이다. 두 사람 모두 급진적이었지만, 한편 비엔나 필하모닉의 명예 지휘자로서 커리어를 마쳤다.

 

그들의 등장은 전쟁으로 인해 피할 수 없던 휴지기와 연결될 수 있다. "유럽은 파괴되었고, 통째로 재건되어야 했죠 - 문화적인 차원에서 말입니다." 에마르가 말했다. "한쪽에는 아방가르드가 필요했죠; 한쪽에는 혁명적으로 세계를 새롭게 정의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불레즈는 1996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분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상황에 처했더라면, 새로운 대의를 따르는 일에 크게 빠졌을 겁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쇤베르크와 베베른, 베르크, 바르톡, 스트라빈스키를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지휘하는 걸 의미하는데, 그렇게 작곡가들은 청중들과 새로운 작곡가들에게 정확하게 평가받을 수 있었다 - 비록 그는 작곡가들이 그런 이전 시대를 벗어나길 요구했지만 말이다.
 
아르농쿠르가 무조음악과 음렬주의 작곡가들(예컨대 불레즈)의 작품이 "음악가와 청중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음악이라고 매섭게 몰아붙였지만, 그는, 불레즈가 그랬듯이, 채워져야 하는 빈 공간을 봤다. 1954년에 쓴 신조(credo) "역사적인 음악의 해석"에서, 아르농쿠르는 브루크너와 차이코프스키, 슈트라우스 이후에 "음악은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옛 음악에 판결 내리고, 작품이 쓰인 시대에 알맞게 연주" 하려는 시도는 "진짜 살아있는 현대음악을 잃어버린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음악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그는 믿었다, 맹렬한 시대악기 연주가 그걸 대신할 수 있다고.
 
두 사람 모두 그런 측면에서 특정 종류의 기억 상실을 요구한 것이다. 아르농쿠르는 음악가들이 작품을 "마치 이전까지 한 번도 해석된 적 없고, 마치 한번도 만들어졌거나 왜곡된 적이 없던" 것 처럼 듣고 연주할 것을 촉구했다. 불레즈는 과거의 음악을 - 이상적인 환경 아래라면, 그건 - 미래를 위해 순수하게 채굴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음악에) 주의를 기울이고, 왜곡시키고, 잊어버리고, 찾고,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전이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없어질 수 있을 때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에 낙인찍는 과정에서, 두 음악가는 새 단체를 세우며 새 전통에 활기를 집어넣었다. 불레즈는 1954년 일련의 도맹 뮈지칼 콘서트를 만들었고, 1954년 다름슈타트 여름 학교를 개척했고, 마침내, 1970년대에, 음향/음악 연구소 이르캄(IRCAM)과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렝을 설립했다. 아르농쿠르는, 그의 아내 앨리스와 함께, 1953년 시대악기 앙상블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설립했다.

 

그런 플랫폼은 그들의 정도(正道)에 중요했지만, 사실 그들은 오케스트라를 넘어, 하나의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사고방식들이 퍼지면서, 그런 형태의 단체 - 신음악 앙상블과 시대연주 악단 - 는 확산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했는데, 에마르의 이야기를 더하자면 이렇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건 동시대 사람들이 그들을 시대의 등대로 느꼈다는 거에요."

 

단호하게 나누어진 등대의 광선은 - 동시대의 경로를 빛낸 하나와, 고대를 빛낸 다른 하나 - 후배 음악가들에서 계속해서 겹쳐졌다. 이어지는 해석가 세대는 두 트랜드를 합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사이먼 래틀은 영국의 명성을 세 집단으로 부흥시키지 않았는가: 기존의 교향악단인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현대음악 단체인 런던 신포니에타; 시대악기 앙상블인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래틀은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데, 아르농쿠르의 서거에 대한 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출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완전히 다른 길에서 우리가 음악을 듣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 있어 음악철학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더 어린 세대의 지휘자들에게 있어, 양쪽 극 사이를 움직이는건 더 쉬운 일이 되었다. 38살 세인트 루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이자 불레즈의 친구였고, 최근에 콘첸투스 무지쿠스를 지휘하기도 한 파블로 헤라스-카사도는 두 사람 모두 다른 어떤 것보다 악보를 중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들 모두 무대 위에서 매 순간마다 유래 없는 감각을 만들어내려고 애썼어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새롭고 창조된, 충격적인 경험이요."

 

그러나, 헤라스-카사도의 연배에게, 불레즈와 아르농쿠르는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시각에선 폭력으로 보일, 또한 그 확실함 때문에 외골수적으로 보일 만한 주장 아닌가.

 

각자의 맹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향은 결국 더욱 건강하고, 다양하며, 포괄적인 음악 생활을 이끌었다 - 좋던 나쁘던, 그 문화는 미학적인 논쟁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이제 누가 우리를 앞으로 움직일 것인가?


http://www.nytimes.com/2016/03/19/arts/music/boulez-and-harnoncourt-so-different-yet-more-alike-than-they-realized.html?_r=0
평소 가졌던 생각과 거의 비슷한 기사를 봐서 옮겨본다. 상당히 반가운 기사였다. 글을 따로 안 써도 되겠다는 느낌?


전후(戰後) 혁명가의 죽음은 음악계의 일만이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죽음에서 크게 실감나던 현상. 길게 잡아 1930~60년을 사이로 태동하던 새 방법론과 시각은 표준이 되었다. "표준이 되었다", 상당히 무서운 말 아닐까. 기사의 마지막 단락이 자연스레 머리 속에 남는다. "이제 누가 우리를 움직일 것인가?" 그리고 그건 어떤 종류의 인식론적 전환일까? 우리가 이전 세대를 오독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전환 말이다.

 

아르농쿠르가 오래 남을 이유는 선구적인 동시에 교조적이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강력한 틀을 가지되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시각. 연주의 목적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생각과 물질을 재구성하여, 현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 그와 동시대를 풍미한 '강경한' 역사주의 연주가들에 비해 아르농쿠르는 고증의 측면에서 오히려 자유롭게 연주한 편이 아닌가. (모차르트 오페라가 좋은 예시다)

 

 

불레즈는 더 논쟁적이다. 본인에게 있어 불행이자 동시에 행운으로, 그는 작곡가다. 즉 불레즈는 세상을 뜬 올해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논쟁적인 파리의 로베스피에르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드뷔시를 뛰어넘은 파리 음악원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는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인가. 혹은 예술의 역사에 흔히 있어왔던 과격한 전위대의 수장 정도로 기억될 것인가.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불레즈는 죽었다(Boulez est mort)', 그리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위대했던 천재에게 경의를.

 

  1. Johann Nikolaus Graf de la Fontaine und d’Harnoncourt-Unverzagt. 더 정확한 명칭이 있을 것 같은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