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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기타

에두아르트 반 베이눔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8년 베토벤 교향곡 2, 7번 BBC Legends)

by Chaillyboy 2016. 8. 13.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제2번 Op.36 (1801-1802)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제7번 Op.92 (1811-1812)
1958년 11월 10일, 로열 페스티벌 홀, 런던


에뒤아르트 판 베이뉨 (에두아르트 반 베이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리마스터링: 폴 베일리, 리:사운드


BBCL41242


01 Adagio Molto - Allegro Con Brio __ Symphony No.2 In D Major, 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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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Adagio Molto - Allegro Con Brio __ Symphony No.2 In D Major, 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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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1958년 필하모니아 베토벤 사이클


에뒤아르트 판 베이뉨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가졌던 짧은 관계는 문자 그대로 돌발사고에서 시작한다. 1931년, 그가 30살이었을 때, 그의 지휘 경력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1938년 빌렘 멩엘베르흐 휘하에 있던 이 오케스트라의 공동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 자리를 맡았다. 1945년, 74살의 멩엘베르흐는, 50년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맡아왔지만, 전시 행적에 대한 처벌로 지휘대에 오르는 게 금지되었다. 판 베이뉨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남은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의 수장으로 남았다.


월터 레그는 1945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설립했고 19년 동안 "인자한 독재자"를 자임했다. 필하모니아는 EMI의 가장 중요한 녹음 오케스트라였고, 또한 레그는 EMI의 수석 프로듀서였으니, 그의 공연에는 EMI 소속 음악가들이 주로 출연하게 되었다. 판 베이뉨은, 반면, 1953년까지 데카, 이후 1954년부턴 필립스에서 녹음해왔고, 보통 암스테르담에서 콘세르트헤바우를 지휘했다.


1950년대 중반 레그의 필하모니아와 함께 한 공연과 녹음들에서 오토 클렘페러는 걸출한 해석자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베토벤 교향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5년 12월에 그가 처음 녹음한 3번과 5번, 7번 교향곡은, 1955년 12월까지 녹음됐는데, 레그가 클렘페러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당연하게 원했던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레그는 72살의 지휘자가 1957년 10~11월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아와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을 연주할 수 있고, 또한 근처에 있는 킹스웨이 홀에서 남은 여섯 교향곡을 녹음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율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갔다. 사이클은 두 번의 연주회에서 9번 교향곡이 연주되며 기억할 만한 마침표를 찍었는데, 필하모니아 합창단의 데뷔가 대성공을 거둔 순간이기도 했다. 클렘페러의 명성은 그렇게 베토벤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레그는 1957년의 성공을 클렘페러의 두 번째 베토벤 사이클로서 재현하려고 했는데, 1958년 10월과 11월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0월 중순 클렘페러가 기관지염을 앓으면서, 리즈 트리엔날레에서 필하모니아와 예정된 세 차례의 공연을 취소해야 했던 것이다. 이건 그저 또 다른 일시적인 차질로 보였는데, 지휘자가 수년간 건강 문제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상황이 이어졌다. 병환에서 회복되는 도중, 클렘페러는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다 잠에 들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이부자리는 연기를 검게 내며 타고 있었고, 불을 끄기 위해 그는 액체를 뿌렸지만, 이는 인화성이 높은 장뇌 방향제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당시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화상을 입었고, 베토벤 사이클을 지휘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레그는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지휘자를 찾아야만 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10월 27일에 있던 첫 공연을 맡을 여유가 있었다. 이후, 레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레코드 안팎에서[각주:1], 파버&파버, 런던, 1982년): "에뒤아르트 판 베이뉨이 가장 각별하게 도와줬는데, 나는 그를 아주 존경했지만 내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맡기거나 만나보진 못한 상황이었다." 판 베이뉨은 남아있는 여덟 공연 중 여섯 개를 지휘할 수 있도록 네덜란드에 잡혀 있던 그의 일정을 재조정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두 공연은 지휘할 수 없었는데, 앞선 해처럼, 9번 교향곡이 포함된 공연이었다. 


의사는 만약 클렘페러가 교향곡을 지휘하지 못하는 걸 알게 되면 그의 병환이 재발할 거라 레그에게 말했지만, 결국 그는 상처받은 남자에게 안 좋은 소식을 꺼내야만 했다. 레그는 클렘페러에게 작은 보상으로서 열한 명의 유명 지휘자 명단을 보여주며 그를 대체할 사람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클렘페러는 차례대로 거절하다가,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를 제안했고, 레그는 경악했다. 힌데미트는 이 년 전 자신의 몇몇 작품을 필하모니아와 함께 녹음했고, 자기 작품에는 뛰어난 지휘자였지만, 베토벤 지휘자로서는 아무런 명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레그는 클렘페러를 기쁘게 만들고 싶었고,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힌데미트가 지휘한 두 번의 연주회[각주:2]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 일화는 클렘페러의 꽤나 칙칙한 유머감각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는 방문자들 앞에서 경악하며,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냐고 조롱하듯이 표현했기 때문이다. 



판 베이뉨의 경우 레그의 근거는 더 확실했다. 네덜란드인 지휘자가 런던에 처음 등장하고 시간이 꽤 흘렀고, 즉 청중들에게 판 베이뉨은 이방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1949~1951년 사이에 런던의 두 번째 오케스트라인 런던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1~2월 로열 알버트 홀에서 런던필과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을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그에게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호감을 주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여기에는 그가 어마어마한 지식을 가졌고 오케스트라 테크닉에 통달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오케스트라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단원들이 그에게 원하는 걸 정확하게 알았고, 항상 그들과 함께 일한다고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필하모니아의 단원들 사이에선 지금까지 작업해왔던 지휘자 중에 그가 가장 뛰어나다는 여론이 생겼다 - 심지어 그가 위대함에는 한 발자국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도 말이다.


판 베이뉨은 10월 30일 필하모니아를 처음 지휘했는데, 에로이카 교향곡이 포함된 연주회였다. 런던의 이브닝 뉴스에서 유명 평론가이자 학자인 모스코 카르너는 이렇게 썼다: "연주를 이렇게 만족스럽게 만드는 건 신체와 정신을 음악 속으로 푹 스며들게 해 (지휘봉이 없는) 손 아래로 모으고 단원들에게 똑같은 걸 하도록 만드는 그의 능력이다." 또 다른 유력 평론가, 네빌 카더스는, 멘체스터 가디언에, 판 베이뉨이 "이탤릭체나 자기 자신을 강조하는 법 없이 베토벤을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제시하는 진정한 음악장인"이라고 썼다.


이 디스크에 실린 연주는 판 베이뉨의 (두 교향곡에 앞서 코리올란 서곡이 연주된) 네 번째 필하모니아 연주회에서 가져왔다. 데일리 텔레그레프에 익명으로 실린 논평에는 지휘자가 "자연스러움과 균형을 작품마다 불어넣었는데" 이런 "연주를 듣는 건 특권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종종 신랄했던 비평가 찰스 레이드는 판 베이뉨이 네 대의 호른과 세 대의 트럼펫을 사용하면서 각각 두 대씩 명시한 베토벤의 지시를 어겼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비평계와 객석의 반응 모두 판 베이뉨의 여섯 연주회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의 성공 이후 판 베이뉨이 필하모니아를 다시 지휘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수 년 동안 그는 심장 질환을 앓아왔고, 마지막 필하모니아 연주회 이후 다섯 달 만에 그는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제1번 교향곡을 리허설하는 도중 치명적인 심장발작으로 사망해버렸다. 그의 녹음 유산에서 베토벤은 많지 않은데 - 서곡 몇 곡과, 프로메테우스 극음악, 그리고 로베르 카자드쥐와 아르투로 그뤼미오를 반주한 협주곡이 있고, 시판된 교향곡은 오직 1954년에 녹음한 2번이 전부다. 여기 실린 실황은 판 베이뉨의 예술 세계를 새롭게 조명해주는데, 왜냐하면 연주에선 스튜디오 녹음에서 보인 그 이상의 서정적인 웅변과 직관적인 표현이 주목할 만한 수준으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알란 샌더스, 2003년 (내지를 번역함)


잦은 조회를 위해 (...) 제목은 반 베이눔으로 적었습니다. 혼자 판 호흐라고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도 항상 판 베이눔이라 읽었는데, 외국어 표기법이 - 특히 네덜란드어는 - 생각보다 복잡하네요.


판 베이뉨의 여러 각별한 연주들 중에서도 이 연주는 특별합니다. 물론 당대 최고였던 필하모니아를 만났다는 이벤트가 제 느낌을 부풀리긴 할 겁니다, 하지만 연주 자체가 최상인걸요. 판 베이뉨이 항상 보여주는 밀도감 높은 음향, 내지에서 직관적인 표현이라고 언급한 짧은 반응시간과 번뜩이는 재치, 땅바닥에 붙어있는 강한 리듬. 그 안정감이 방출하는 이글거리는 생명력. 선율이 강조되는 유려한 곡에서 베이뉨은 손해를 보겠지만, 구조와 큰 그림을 그리는 베토벤은 성공적입니다.


2003년 당시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판 베이뉨의 다른 베토벤 연주들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콘세르트헤바우와 네덜란드 방송국에서 - 혹은 문을 닫은 안단테 레이블에서 - 낸 박스에는 프란체스카티를 반주한 바이올린 협주곡과 솔로몬을 반주한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에로이카를 지휘한 영상이 통째로 남아있죠.


http://nachtklassiek.ntr.nl/2011/10/14/ludwig-van-beethoven-%E2%80%9Ceroica%E2%80%9D-het-concertgebouworkest-o-l-v-eduard-van-beinum-05-05-1957/


같은 소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명예학위 (혹은 공로상?) 수여 장면에서는 판 베이뉨이 지휘하는 코리올란 서곡이 잠깐 페이드-인 됩니다. 서거하기 얼마 전으로 보입니다.


동영상에서 샌더스 씨의 글이 (어차피 본인 평가는 한 줄밖에 없지만) 보입니다. 지휘 쉽게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전 세대 예술가들은 음악을 쉽게쉽게 하죠. 성취는 압도적이면서요. 음악이 몸에 체화된, 그래서 일말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 성과를 끌어올릴 수 있는 자연스러움. 몽퇴의 간결하지만 극도로 정교한 지휘라던가, 언급된 판 베이뉨, 루빈슈타인의 무덤덤한 동작과 대조되는 다채로운 음색과 다이나믹, 성대만 그냥 떠는 것 같은 직선적인 멜히오르의 음성. 녹음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기교 없이 음악을 만들던 시대였으니까요.

  1. 월터 레그 평론이 들어있는 그 책 맞습니다. [본문으로]
  2. 판 베이뉨이 지휘하지 못한 두 차례의 9번 교향곡 연주회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