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아이브스: 뉴 잉글랜드의 세 장소
1970년 1월 13일, 심포니 홀, 보스턴
장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4번
리하르트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여명과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
1970년 3월 10일, 심포니 홀, 보스턴
마이클 틸슨 토마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ICA Classics (ICAD 5111)
1969년 10월 22일, 마이클 틸슨 토마스는 윌리엄 스타인버그를 대신해 뉴욕 필하모닉 홀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상임으로 임명된지 얼마 안 된 윌리엄 스타인버그는 브람스 교향곡 제2번을 지휘하는 도중 통증을 느꼈고, 새롭게 임명된 스물-넷의 부지휘자는 인터미션에 로버트 슈타러의 까다로운 새 작품 이중 협주곡과 슈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을 지휘해달라 요청받은 것이다. '키가 크고 마른 젊은이가 어마어마한 자신감과 확신을 두르고 무대에 올랐다, 그는 자신감이 허튼 게 아니란 걸 보였다.' 해롤드 C. 숀버그는 다음날 뉴욕 타임스에 이렇게 썼다. 그건 '그에게 황금같은 기회였다.' 그리고 숀버그는 결론 내렸다. '토마스 씨는 그가 할 일을 알았다, 우리는 앞으로 그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계획에 없던 뉴욕 데뷔가 세간의 주의를 끌고, 토마스의 경력에 있어 중요한 동력이었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며칠 뒤 타임스에 실린 짧은 인터뷰에서, 앨런 휴스는 토마스가 '결코 눈이 휘둥그레져 처음 찾아온 큰 기회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고' 적는다. 게다가, 심지어 뉴욕에서도, 그는 이미 '복잡한 아방-가르드 음악의 지휘자'라는 명성을 쌓고 있던 것이다 - 혹은 적어도 그런 식으로 그는 첼리스트 로렌스 레서와 몇 달 전 타운 홀에서 가진 연주회의 평론에 묘사되고 있었다. 심지어 청년 시기에, 토마스는 스트라빈스키나, 코플랜드, 불레즈, 하이페츠와 같은 세기의 다양하게 빛나는 음악인들과 긴밀하게 작업해왔다.
틸슨 토마스와 보스턴 심포니의 협업은 1968년 오케스트라가 여름을 보내는 탱글우드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여기서 영광스러운 쿠세비츠키 상을 수상한 것이다. 돌아오는 여름에, 그는 보스턴 필하모니아를 객원 지휘하며 보스턴에서 데뷔하는데, 스타인버그는 이 공연에 참석했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해 가을 보스턴 심포니의 바톤을 받으며 그를 조수로 임명했다. (보스턴 필하모니아는 어떤 측면에서도 뛰어난 앙상블이었다; 세이지 오자와, 클라우디오 아바도, 알렉산더 슈나이더가 당시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여기 수록된 아이브스의 뉴 잉글랜드의 세 장소는 1970년 1월 13일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있던 연주를 녹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바로 전해 10월 보스턴에서 있던 공연과, 토마스의 깜짝 데뷔 일주일 후 카네기 홀에서 있던 프로그램과 같았다. 하이든의 98번 내림 나장조 교향곡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1969년 11월 보스턴 글로브는 토마스를 긴 글로 소개했는데 '그가 대다수 동료들에 비해 훨씬 더 연습에 필요한 학술적인 요소를 잘 알고 있다.' 고 쓰고 있다 - 이런 지적은 토마스가 당시 하프시코드를 치며 교향곡을 지휘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에 이어 아이브스가 연주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관현악 작품인 변주곡들 (올더스 헉슬리를 기리며) 과, 드뷔시의 바다가 2부에 연주되었다.
아이브스의 음악은 토마스의 경력의 중심에서 꾸준하게 연주되었다, 그리고 그의 넓은 디스코그래피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사실, 이 지휘자의 첫 번째 메이저 레이블 녹음은 - 높은 평가를 받고 많은 상을 받았던 도이체 그라모폰의 뉴 잉글랜드의 세 장소와 칼 러글스의 썬 트레더 (1970) - 이 BSO 콘서트 직후에 만들어졌다. 실황은 스튜디오 녹음보다 미세하게 흐름이 자유롭고 제어가 느슨한 편이다, 하지만 두 해석 모두 소란스러운 당김음 너머로 호흡이 긴 서정을 선호한다. 토마스의 카네기 홀 연주를 평론한 타임스에서, 앨런 휴스는 아이브스에 대한 지휘자의 접근방식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토마스 씨에게 작품은 골동품이 아니다, 또한 가볍게 지휘할 만큼 새로운 곡도 아니다, 다만 아름다운 음악일 뿐이다.' 같은 평론에서, 휴스는 또한 토마스의 수정명료한(crystal-clear), '사무적인' 지휘법을 묘사한다. 휴스는 계속 말한다: '그의 동작은 정확했고, 대부분 실속있었다, 포디움에서 그는 한 곳에 계속 발을 붙였다, 바톤을 사용했고, 악보로 지휘했다.'
여기 생중계된 아이브스의 세 장소는 토마스가 일찍이 작곡가에게 보였던, 즉 앞으로 수십 년간 작곡가를 옹호하게 될 열의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한편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4번과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서 발췌한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은 토마스의 비디오/디스코그래피에 지금까지 없던 곡이기에 귀중하다. 두 곡 모두 1970년 3월 10일 공연에서 가져왔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이후 연주되었고, 바그너의 곡 이전에 쇤베르크의 다섯 개의 관현악 소품 op.16이 연주되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4번을 판촉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었다. 윌리엄 피어스는 당시 공연 책자에서 (쿠세비츠키가 지휘한 이후) 30년 만의 연주라고 언급했다. 아이브스에서 그랬듯이, 토마스의 접근은 주로 서정성을 살린다. 시작은 팽팽하기보단 음울하며, 첫 번째 악장 중심 전개부의 흔들리는 클라이맥스에서 지휘자는 불꽃을 잡아낸다. 보스턴 글로브에 첫 번째 공연을 평론한 크레이그 스미스는, 토마스가 '이 난곡이 요구하는 바를 모든 면에서 똑같이 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스미스는 이어 말하는데: '연주는 이 산만한 작품을 완벽하게 합칠 수 있는 리듬의 엄격한 견실함을 잃었지만, 대신 시벨리우스가 만든 흥미로운 짜임새를 명료하게 하도록 놀라울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바그너의 손녀 프리드린트와 함께 토마스는 1966년 여름을 바이로이트에서 보조 지휘자로 보내며 공부를 계속했다. 칼 뵘의 논쟁적으로 빠른 페이스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그 해 녹음되었다, 그리고 토마스가 의미심장할 정도로 날렵하게 해석한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은 비슷하게 추진력 있고 강렬하다. 여기 덧붙이자면, 글로브에서 크레이그 스미스는 오케스트라의 빼어난 금관과 리듬의 생생한 해석을 높이 사며, 그것으로 인해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은 멋진 공연의 짜릿한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앤드류 파락-콜턴 (내지를 번역함)
연주 좋네요. MTT식으로 근심걱정없이 휙휙 지휘하지만, 들릴건 다 들리는 느낌. 음향을 폭발시키는 것도, 아이브스의 폴리리듬을 살리는 것도 모두 맘에 듭니다. 젊은 지휘자가 흔히 보이는 과도한 제어나 자의식이 보이지 않아서 더 좋네요. 강심장인가봐요.
바이로이트 보조 지휘자 껀은 간단하게 정리하면 좋겠네요. 디비디에 수록된 인터뷰에서는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했다고 본인이 말했는데, 바렌보임도 참석하고 뭐 그랬다고... 관련된 이야기가 음악춘추 12년 6월호 소프라노 채리숙이란 분의 기사에 실려 일부 발췌해봅니다.
그 때 선생의 나이는 28세였으며,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11명 중에는 정경화, 정명화, 한동일 등이 동기로 있었다. 그리고 헝가리 출신의 프레쉘(Freshel) 교수를 사사한 채리숙 선생은 스승의 추천으로 두 차례의 오디션을 치른 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 때 음악제에 참가하게 해주셨고, 매니저처럼 돌봐주신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은인입니다. 무거운 짐도 못 들게 할 정도 예뻐해 주셨고,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 바이로이트 가서 그런지 많은 관심을 갖고 돌봐주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은 채리숙 선생이 바이로이트에서 생활하던 3년간 집세, 생활비, 레슨비, 용돈 그리고 레슨 코칭까지 모두 책임져 주기도 했다. 바그너의 손녀인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은 매년 오디션을 통해 지휘자, 성악가 등 10여 명을 선발해 바이로이트 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제 중 하나인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제의 명성답게 세계적인 음악가가 모이는 이 곳에서 채리숙 선생은 오페라와 관련된 여러 가지를 지도받으며 오페라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보스턴 심포니의 그 시절은 점점 잊히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꼬인건지 감도 안 잡히고(오자와를 탓하는건 단순한 설명이라는 생각도 잠깐 들어요), 음반이 소비되는 방식을 돌이켜 볼 때 앞으로도 그들의 리즈가 발굴될 날은 어지간해선 오지 않을 것 같다는... 해적반을 뒤질 필요도 없이 MTT와 보스턴의 차1은 결정반급이죠.
한편(2), 이런 훌륭한 지휘자가 한국에서 말1을 지휘해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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