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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음반들(하이페츠, 바세비치, 자발리쉬, 기제킹) - 최근 감상

by Chaillyboy 2023. 2. 25.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 하이페츠/모이세비치(1951, RCA/Naxos) : 얼마 전 방문한 LP 감상실의 사장님은 CD시대에 손해 본 바이올리니스트로 하이페츠를 먼저 꼽았다. 간단히 요약하면 LP에서는 그렇게 날이 선 깽깽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 하이페츠의 LP는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은근히 널리 퍼진 이야기가 아닐지.. 나도 사장님의 워딩을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들어온 이야기를 덧대서 기억한게 아닌가 싶다.

 

사실 이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라기보단 모두가 의심없이 납득할 이야기가 아닐지 싶다. 유아인이 마약했다는걸 처음 들은 사람은 많아도 의외라고 놀라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이페츠도 LP로 들으면 다르다는 말에 모두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내가 CD를 잘못 들은게 아니었어'). 만신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런 소리 밖에 못 내냐는 감상의 신성모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건 장삿속의 CD 엔지니어 탓으로 돌아가고...

 

CD에서 손해 봤다는 이야기는 일단 맞을 것이다. 다만 꺼림찍한게 있다. 매체 전환기에 사라졌다는 아름다운 사운드가 과연 하이페츠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일지 싶은거다. 밀스타인의 경우 하이페츠의 사운드를 "장대하다"고 한 큐에 설명했다(오데사의 이빨답게 하이페츠가 아우어 클래스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녔던 것 같다고 덧붙이지만). 당대에도 하이페츠의 "차가운"(RCA의 찰스 오코널) 사운드는 쟁점이 됐던 것 같다. 그렇다면 하이페츠는 동시대 감상자들이 가지는 기준적인 현악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무언가를 당시에도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를 지금과 같은 위상으로 만들었다는 것. 단순히 개성거리로 소화하기에 하이페츠의 음악은 정말 이질적인 요소가 있어서 그것이 동시대 감상자의 귀를 바꿔버리고 그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든 것으로 나는 추정한다. LP에서 더 아름다운 하이페츠 사운드가 울렸더라도 말이다.

 

모이세비치의 반주로 연주한 크로이처 소나타는 여러 모로 인상적이다. 우선 앙상블. 당대에도 강한 개성으로 유명했던 두 음악가는 얼핏 자기 이야기만 하는 듯이 보인다. 도입부의 피아노는 하이페츠의 셈여림 연출을 전혀 신경 안쓰는 듯한 강성이다. 하지만 크게 볼 때 두 사람의 앙상블은 각자의 개성을 곡 전체를 해석하기 위한 요소로서 녹여낸다. 실상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연주가 아닐까(다시 언급하겠지만 같이 실린 카펠과의 연주는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는 채로 탐색하고 경계하는 뉘앙스가 있음. 이게 꼭 나쁜건 아닐 것이다). 1악장 후반부의 리듬과 셈여림은 정말 짜임새있게 기획되었음. 2악장은 1악장 해석의 연장선에서 이해가 됨. 아, 근데 이거 서로를 듣기 위해 셈여림을 줄이면서 재미도 줄어든 연주는 아닐까? 스튜디오 녹음에서 이러는게 문제는 아니라는게 내 생각이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퇴폐적인 뉘앙스를 은근하게 끌어올리는 효과도 있고(톨스토이 때문에 뇌가 오염되어버린듯). 게다가 귀 귀울여 들어보면 하이페츠 특유의 초인적인 톤 컨트롤은 여전하다.

 

기왕 음반을 꺼냈으니 같이 묶인 녹음도 간단히 짚어보자.

 

카펠 반주의 브람스 소나타 3번(1950, RCA). 카펠은 하이페츠를 자극한다. 능청스러운 그의 정박 타건은 하이페츠에게 판을 편하게 깔아주지만 동시에 어그로를 끌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하이페츠의 보잉은 평소보다 더 독이 올라있고 이것은 그의 기예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연주의 최대 진가는 명확함이 아닐까. 멜로디 간의 관계와 리듬 구성, 큐 사인등이 정말 투명하게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읽는 악보가 눈에 선하다. 한편 실황에서 이런 연주를 들었다면 하이페츠의 초절기교보다 카펠의 제어에 더 놀랐을듯. 펄펄 끓지만 기어이 선을 넘지 않는 3악장. 여기서 해소되지 못한 하이페츠의 에너지가 4악장에서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루빈스타인 반주의 프랑크 소나타(1937, HMV). 루빈스타인과의 앙상블은 유독 아쉽다. 어우러짐이 잘 안느껴지는 연주. 다만 아다지오의 종결부와 레치타티보는 하이페츠에게 기대하는 그런 "장대함"을 충분히 드러낸다. 여기 실린 세 연주 중에 동시대 감상자들이 제일 하이페츠답다고 느꼈을 연주는 어쩌면 이것이 아닐지. 

 

바세비치 피아노 오중주와 소나타 2번 - 지메르만과 일당들(2009, DG). 기묘한 현악기 앙상블로 시작되는 피아노 오중주 1번(1952)에서 기대를 느꼈다. 어법이 대단히 새롭지는 않고 피아노와 현악 사중주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는 어찌보면 고전적인 향취까지 느끼게 한다. 참신함을 소비하기 위해 한 번 듣고 넘길 음반 같지는 않다. 작곡가는 곧 다가올 서유럽 아방가르드의 경향처럼 악기와 편성의 가능성의 극한을 탐험하지는 않지만, 음향적인 탐구를 꾸준하게 이어나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구성을 선보인다. 이에 비해 피아노 오중주 2번(1965)은 더 동시대에 맞닿아 있지만 오히려 참신함은 떨어져보인다.

 

음반의 중심점이 지메르만에게 있는건 어쩔 수 없어보인다. 특유의 밝게 뚝뚝 떨어지는 듯한 피아노 음색이 앙상블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지메르만은 본인의 매력을 과시하지 않고 실내악 전체의 사운드를 위해 정교하게 연주를 조절한다. 독주곡이 커플링되지 않았으면 실내악에서도 더 과시하는 연주를 들려줬을까? 피아노 소나타 2번(1953)은 플콥 피소와 비슷한 계열처럼 느껴지지만, 플콥처럼 눈치 안보고 내지르는 강단은 없어보인다. 간혹 정갈한 모피소의 구조가 느껴지기도 해서 당혹스러움(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지메르만의 피아노는 참 좋다.

 

한편 2012년 경에 지메르만이 이 음반을 냈을 때 종종 보이던 '왜 다른(중요한)거 냅두고 이상한 곡이나 녹음하냐'는 식의 언급은 나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레비치를 여성 작곡가(나디아 불랑제, 구바이둘리나)만 가져와서 비교한, 그리고 공산권에서 활동해서 묻혔다는 식의 내지 해설은 더 나쁘다.

 

자발리쉬/런던 심포니의 1973년 잘츠부르크 실황(Orfeo). 실황 전체에 대한 인상비평. 1973년은 런던 심포니의 기세가 꺾이기 바로 전이라 특유의 청량한 사운드는 여전하고  샐러드 장인으로 전직 중인 70년대의 자발리쉬도 재료의 맛을 살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슈베르트 초기 교향곡에서 심심함을 넘어서기 어려워보인다. 슈베르트 교향곡 3번은 어떤 연주를 들어도 지루하고 이 연주 역시 비슷하게 지루하다(도갤 슈베르트 덕후 씨한테 초기 슈교 듣는 재미를 꼭 물어봐야겠음).

 

발효된 콧소리-디스카우의 모차르트 이탈리안 아리아(KV196/14, KV541, KV513). 디스카우는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자발리쉬도 가수의 흥을 잘 체화한 반주를 보여준다. 즐겁게 듣고 환호 보낼 수 있었을 연주. 이런 연주를 편하게 들을 수 있는게 본토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기도(콘서트홀에서 명연이 반드시 나와줘야만 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띈 우리 토양의 빈곤함이란). 한편 첫 곡은 <가짜 여정원사>의 아리아인데 왜 얘만 독어로 번안해서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곡을 몰라서 그런지 독어 가창이 어색하게 들리진 않음.

 

커트 와일의 교향곡 1번(단악장의 베를리너 교향곡)은 가장 이질적인 선곡이 아닐지? 하지만 그게 신기하기도 했고 잘 모르는 곡이기도 해서 냅다 음반을 집어든 이유가 되기도 했다. 빈필 데리고는 이런거 못했겠지.. 바일이 부조니의 베를린 클래스에서 배우면서 1921년에 만든 곡으로 음향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 슈레커 풍의 침잠하는 후기낭만 색채를 도회적인 활기로 잘 걷어낸 곡처럼 들린다. 1921년은 바일이 브레히트를 만나기 전이고, 이 사람의 커리어를 쭉 놓고 본다면 이 곡은 꽃피우지 못한 다양한 가능성이 상존하던 기록으로 들리기도 한다. 비교감상을 안해봤으니 연주를 평가할 짬은 안되지만 일단 런심과 자발의 성향이 얼추 잘 어울리기는 했음. 하지만 이 곡의 모든 가능성을 죄다 끌어내진 못한듯.

 

슈트라우스의 틸 오일렌슈피겔 연주는 탁월하다. 이것 하나로 돈 값 한듯. 화려하지 않지만 단호하고 분명한 강세와 리듬이 어느 순간 칼춤을 추고 있는거 보면 역시 오페라 지휘자의 슈트라우스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느낌. 음향의 가능성도 상당 부분 뽑아낸 것 같고(파르지팔의 음향으로 무뢰한을 묘사하는 에르슈 특유의 구성과 어법. 아, 근데 파르지팔도 무뢰한 아닌가). 1970년대의 자발리쉬는 아직 5-60년대의 강단과 총기가 남아있기에 이런 연주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틸 오일렌슈피겔에는 쟁쟁한 연주가 워낙 많아서.. 

 

 

슈만 크레이슬레리아나 - 발터 기제킹(1953, BBC Legends). 기제킹은 가면 갈수록 실망이다. 그가 명확하게 깃발을 꽂은 드뷔시를 제외한다면 그에게 특별히 인상적인 순간은 망가지는 순간 밖에 없다. 제한된 셈여림 안쪽에 구축한 자기 왕국이 기량의 저하로 무너져가던 노년의 기제킹. 물론 전성기에는 몇몇 예외(몇몇 바흐 녹음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실황 등)들이 있었기에 계속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지만 계속된 실망에 지칠 뿐. 심지어 이 사람은 방송녹음을 많이 남겨서 고만고만한 연주들을 지독하게 많이 들어야한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기제킹은 후대의 회고에서 인성 문제 많았다, 나치였다는 이야기만 잔뜩이다. 인사치레용 미담조차 전혀 없는 기묘한 인간. 그의 인성이 어땠는지는 음악듣는 내 입장에선 전혀 알 바 아니지만 모든 회고가 인간성 괴담에서 끝나고 음악 이야기가 1도 안나오는걸 보면 문제가 맞긴 한듯.

 

그래도 이 연주에서 미덕을 찾아볼까. 사색적인 순간(Sehr innig)이 분명 있다. 크레이슬레리아나보다는 교향적 연습곡 같은 곡에서 더 어울릴만한 이러한 특징은 엉켜들어가는 손가락의 추락을 그나마 균형감있게 잡아준다. 하지만 기제킹은 노화로 인한 기량의 감소를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킬만한 인간성의 소유자는 아녔을 것 같다.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을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한 순간 헤밍웨이가 그랬듯이 그 추락은 더욱 아플 뿐이다. 

 

한편 나는 아직 크레이슬레리아나에 제대로 공감을 못한 것 같다. 이 곡에 접근하는 방식들에 항상 일말의 아쉬움을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