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덕후용 영화 같아서 보고 왔다(스포일러 있음).
오프닝 크레딧이 어둡고 길게 흐르는 동안 리허설에서 부르는 걸로 들리는 노래가 길게 삽입된다. 그곳에 지휘자가 존재한다. 지휘자의 강한 존재감과 이것을 뒷받침할 그의 자아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그는 아마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권력을 얻었고 생존과 자기 욕망을 위해 주변 사람을 착취할 것이다. 그들이 상처받거나 고생하는 이야기에서, 그 소동과 에너지는 결국 원인을 제공한 지휘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뉴요커는 영화가 "퇴행하는 미학에 어울리는 퇴행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비판의 방향은 뚜렷하다. 문제 있는 인물을 동정적이거나 무책임하게 그리거나, 리뷰어에 의하면, 오늘날의 캔슬컬쳐와 정체성 정치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클래식 음악계를 포괄적인 곳으로 만드려는 모든 시도를 조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를 20여 명 낳은 여성혐오 작곡가 바흐에 공감할 수 없다는 '유색인종(BIPOC) 팬젠더' 학생은 그를 몰아붙이는 타르에게 조까라고 한 뒤 교실을 나간다. 블라인드 오디션은 마치 부조리극의 설정처럼 묘사된다. 타르를 비난하는 젊은 학생들은 핸드폰으로 무장한 폭도처럼 묘사된다. 이들은 인물이라기보단 그냥 자연재해처럼 나타나서 상황을 마구잡이로 왜곡한 뒤 사라진다.
다만 뉴요커의 비판이 온전하지 않아보이는건, 영화가 '오늘날의 캔슬컬쳐와 정체성 정치'의 반대편을 옹호해서 자기 혐의를 완성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가 이른바 '거장시대'에 대한 동정이 있지는 않다. 영화는 젊은이를 어중이떠중이로 묘사하지만 그만큼 노인에게도 가차없다. 그들이 고작 할 수 있는건 카라얀의 연필 수집하기(작중 베를린의 부지휘자), 타르가 사비로 고용한 수행기사를 자신이 퇴임한 오케스트라에서 제공하는 예우로 착각하며 살기(타르의 전임자), 공동묘지 시체에 지휘하기(푸르트벵글러) 따위이다. 작중 노인들은 죽어가거나 미쳐간다. 영화가 그리는 옛 시대의 유산은 고작 타르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장면, 그가 핸드폰을 잘 보지 않는다는 설정, 그리고 아바도의 말러 LP 표지가 전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좁게 볼때 영화가 이른바 '반동정치와 반동미학'을 옹호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냥 눈길이 닿는 어떤 것이든 실실거리며 비웃으려는게 영화의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요점없는 수다가 싫다"고 말하는 리디아 타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나한테는 이 영화가 요점없는 수다처럼 보인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바로 쟁점과 전선을 형성하는 이곳의 지리, 즉 미국적 세계관이 영 형편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는 뉴요커의 애덤 고프닉(본인이 출연함)이 진행하는 리디아 타르의 공개 인터뷰 장면으로 시작한다. 더 뉴요커 페스티벌을 옮긴 이 장면은 미국 인텔리 특유의 화법과 세계관을 거침없이 구사한다. 어제 듣던 팟캐스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라 웃겨 죽는 줄... 이 세계관에 따르면 타르는 '빅 파이브' 클리블랜드와 보스턴을 거쳐 "마침내" 뉴욕으로 옮겨간다. 그들에게 말러 5번은 가장 심오한 곡인데 레니 번스타인이 그 심오함에 도달한 과정을 설명하는 화법과 청중이 거기 보이는 반응은 아카데미에서 툭 하면 나오는 기립박수와 눈물 같은 묘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후 영화에선 말러 5번과 여타 음악이 이러한 태도에 걸맞게 다뤄지지 않는다. 요컨대 '린다' 타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만큼이나 이 영화는 소재를 형편없이 다룬다. 그리고 이건 꽤나 편협한 세계관이라는게 내 솔직한 인상이었다.
인터뷰 장면에서 이어지는 마스터클래스는 모든 음악 요소(음악이든 언설이든)가 장식 수준으로 떠다닌다. 즉 음악은 없어도 그만이다. 현대 작곡가의 과한 악상기호(너무 길어서 기억도 안난다), 바레즈의 재즈 혐오, 바흐의 음악 어법과 다산은 일종의 가십 정도로 소모되면서 그 자체로 영화의 갈등을 만드는게 아니라, 생겨야만 하는 갈등에 풍미를 살리기 위해 첨가될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음악을 빼버려도 사라장과 학교 간판 때문에 여기 왔다는 학생(광대로 소모될 운명)과, 출처 없는 심오함으로 학생을 착취하는 마에스트로만 거기 있다면 사실 그들이 동네 식당에서 먹는 샐러드를 가지고도 똑같은 장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은 감독의 의도처럼 어떤 심오함이나 프로의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공허하게 지나간다. 내게는 이런 문제가 정체성 정치 논쟁보다 훨씬 중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이 세계는 세련됨을 가장하지만 실상 그 안쪽은 빈곤할 뿐이다.
존재 과잉의 리디아 타르보다 더 존재감이 큰 말러 교향곡 5번으로 가면 상황은 악화된다. 작품 중반까지 나는 왜 영화가 말러 5번으로 운을 떼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는 말러가 일종의 맥거핀인가 싶기도 했다. 영화가 말러 5번으로 하는건 음향 스펙터클 제공(블란쳇이 지휘를 배워서 사운드트랙까지 직접 녹음했다고 한다. LA타임스의 리뷰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비판한다)과 아바도의 음반 표지 소환 정도인 것 같다. 한편 말러 5번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던 요소가 타르가 작곡하던 음악이 아닐까. 이 음악은 뒤로 갈수록 희미해지더니 결국 실종된다. 초반에 제시되는 여러 요소들(번스타인, 소음에 민감한 타르, 딸과의 관계, 민속음악학 등)을 잘 덧대면 이 음악이 훨씬 중요하게 쓰이면서 영화를 풍요롭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형편없는 세계관은 그렇게 형편없는 미학으로 옮겨간다. 앞서 언급한 짜임새의 부족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전개될수록 평범한 아트하우스 영화의 문법에 의존한다. 꿈과 현실 뒤섞는 희미한 스릴러 연출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더해 감독의 결단은 고작 이 모든 사건의 맥락을 모호하게 가려버린다는 점인데 이것은 끝까지 풀리지 않다가 동남아로 훌쩍 넘어가 구역질 한번 하는걸로 해소된다. 도대체 뭐하자는건지? 이 반-권선징악(?)적 요소와 관련해서는 불만이 더 많다. 위력으로 제자를 착취하고 파멸시킨 것은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무대에 난입해 열심히 연습한 원투펀치로 지휘자를 쓰러뜨린건 신경쇠약 따위의 이유로 정상참작이 가능할 것 같다. 영화 내내 따라다니던 희미한 악행들이 그 원투펀치에 모두 면죄된 느낌이다. 그러니 고작 하는게 동남아로 넘어가 구역질 한번 하고 진짜 자아를 찾는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나쁜 관습에 태연자약한 결론을 덧붙인 결과물로 보였다. 낙후되었지만 순수한 아시아에서 광명찾는.. 뿔난 서양의 학생들과 대비되는 (캣콜링은 하지만) 순한 아시아 청년들을 보라. 세실 B. 드밀 시대에나 먹힐 관습을 지금 가져다 쓰는건 충격적이다.
어쨌든 영화는 베를린 특유의 분위기를 잘 잡아냈다. 거기다 니나 호스까지. 아주 전형적인 미국적 세계관이 담겼지만 소위 '베를린 영화'에 포함해도 괜찮겠다. 일련의 페촐트 영화들이나, '(반어법)모스트 원티드 맨' 같은 차갑고 내적 친밀감 전혀 없는 분위기의 베를린 배경 영화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류승완의 '베를린'은 탈락). 좀 다른 이야기인데 대구 동성로에 가면 타르가 공격 당했던 건물과 유사하게 만들어놓은 인싸 술집이 있다. 패스티쉬처럼 독일어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그 술집이 떠올라서 많이 웃음.
한편 클래식 덕후 입장에서 해독할게 정말 많다. 그런 관점에서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엘가 첼협이 좋게 들릴 정도면 정말 클덕용 영화가 맞겠지.. 별 기상천외한 드립과 패러디가 나오고.. 재밌긴 했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클래식에 관심 없는 사람은 길을 잃을 영화라는게 아닐지. 잠깐 인터넷 후기들을 찾아보니 당최 무슨 소리들을 하는건지 못 알아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심지어 음악 전공자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던데(이건 문제 있는거 아닌가)... 여기 더해 말하자면 사실 영화의 진짜 알맹이들은 타르가 독일어로 진행하는 리허설들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나마 영화를 덜 공허하게 만드는 부분? 하지만 감독이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리허설에는 자막을 전혀 넣지 않았다. 연출적 의도가 있을테니 여기엔 한국어 자막도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들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재미는 많이 달랐겠다 싶었다. 참고로 뉴요커는 이 리허설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장면"이라고 평하면서 에드거 G. 울머의 '카네기홀(1947)'에 밀린다고 언급했다. 이건 그들 식으로 멕이는 표현인듯.
cf. 힐뒤르 어쩌고 하는 요즘 잘 나가는 영화음악가는 여기 왜 섭외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북북거리는 최근 경향의 사운드트랙이 설 자리는 없어보이는 영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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