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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III 폐막공연 - 23년 통영국제음악제 10일차

by Chaillyboy 2023. 4. 16.


진은숙 :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정적의 파편"

구스타프 말러 : 교향곡 제1번

바이올린: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데이비드 로버트슨,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2023년 4월 9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축제 마지막 날의 통영은 모든 곳이 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맑고 분명한 영상들이 시야를 가득 매웠다. 쪽빛의 바다와 발산하는 초록 속에서 인간들은 평소처럼 자연을 밟고 선 정복자가 아니라 그것들에 짓눌린 채로 힘겨워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문명의 위계를 일순간 전복하는 봄기운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년보다 살짝 한산한 콘서트홀 5층에 앉아 들은 말러는 바깥의 그러한 모습을 그대로 품은듯 선명하면서도 각 요소들이 과감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연주였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탁월한(그래서 구현이 어려운) 해석을 온전하게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오늘 연주가 항상 내 머리 속에서 그리던 말러 1번의 이상적인 해석에 가까웠기에, 나는 상당히 즐거웠고, 그래서 기술적인 흔들림들이 더 아쉽기도 했다.

 

일개 애호가 머리 속 이상적인 해석이 무엇이길래? 나도 아직 이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탁월한 연주에서 세부사항이 큰 그림/주제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는다. 각 요소들이 과감할 정도로 전면에 드러나면서 산만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 아마 말러의 뿔피리처럼 소재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테고, 종말적 세계관으로 향하는 운명의 씨앗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말러 특유의 세계관을 조숙하게 받아들여 거기에 일찌감치 압도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아직 현장에서 이런 연주를 직관한 적은 없고, 녹음을 통해서는 정말 간혹가다 들을 기회가 있었다(바로 떠오르는건 인발/프랑크푸르트의 1987년 방일 실황(미발매), 케겔/라이프치히방송의 1978년 실황(Weitblick) 정도). 

 

오늘 연주는 로버트슨이 불레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세부사항의 명확한 도출과 모든 곡을 어제 초연한 것처럼 만드는 개성적인 음향 밸런스. 특히 후자의 경우 이 곡의 밝은 음색을 살리는데 최적의 개성이 아니었나 싶다. 한편 불레즈와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드라마에 대한 의지. 이런 부분 때문에 나는 불레즈와 다르게 로버트슨의 말러를 좋아한다. 1악장의 첫 번깨 개파(改破) 이후 2악장의 종결부까지 이어지는 연주의 과감한 템포 설정은 그야말로 말러 본인의 지휘를 보는 것 같았다.

 

다만 축제 10일차인 오늘 공연에 오른 연주자들에게 체력이 많이 빠질 시점이긴 했다. 콕 집어서 지적할만할 실수들이 아니더라도(나는 삑사리로 연주회 전체를 평가하는 태도는 영원히 이해 못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연주가 산만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1악장의 개파 이전까지는 몸이 덜 풀려서 그랬다 생각할 수 있을지라도, 3악장과 4악장 역시 연주자나 지휘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간 연주는 아니었던 것같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슨이 한국에서 다시 말러를 연주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콘서트의 중심은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 아니었을까. 집중력 있게 연주를 끝낸 카바코스와 로버트슨, 그리고 작곡가가 무대에 나와 활짝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즐겁게 연주된 오늘의 1부에서 오케스트라는 2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진은숙의 곡을 더 비중있게 리허설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해결해야 할 기술적인 어려움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타악기 주자들이 난해한 지시를 모두 해치우고 주먹 악수를 했던게 기억에 계속 남아있다. 결국 음악도 서로 좋으라고 하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