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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기타

토스카니니: 신화 뒤에 숨은 사내 (프레드 가이스버그 1943년 6월)

by Chaillyboy 2017. 2. 14.

토스카니니: 신화 뒤에 숨은 사내



밀라노를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명성과 재능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02년 나는 이미 토리노 오케스트라와 그의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을 들었고, 그 전에는 라 스칼라에서 그가 초연하는 오페라 게르마니아[각주:1]를 목격했다 (거기서 카루소를 처음 들었다). 매년 밀라노에 간다면, 내가 40년간 그래왔듯이, 토스카니니 전설을 신물 나게 듣게 될 것이다. 내 친구 카를로 사바뇨는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카를로는 역사적인 1898년 토리노 박람회에서 그의 보조 지휘자였는데, 그때 토스카니니는 43번의 공연을 모두 암보로 지휘하며 이탈리아 음악계를 충격에 빠트린 것이다. 그 시절의 젊은이들이 그를 숭배했고 닮으려 했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미래의 바인가르트너와 멩엘베르흐들은 그를 둘러싸고 시중을 들려고 했을 것이다: 'Vai compratemi un pacchetto di macedonia o un Toscano' ('가서 담배 한 상자, 아니 토스카나 시가를 사와'). 그는 검고 냄새가 지독한 이탈리아 시가를 사랑했다. 


가수와 타협하지 않는 토스카니니의 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정말 많은 예술가들이 리허설이 좋지 않게 끝나면 상처를 부여잡고 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는 가수의 덕목과 지성에 진심으로 감탄했고, 토스카니니는 그런 가수를 진짜 친구로 생각했다. 예컨대 샬리아핀[각주:2]과 토스카니니는 요상한 동무였지만, <보리스>와 <메피스토펠레>에서 수 없이 협업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었고, 그들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라 스칼라와 메트로폴리탄에 출연했다.


샬리아핀은 러시아 혁명 직후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라 스칼라에서 보리스를 불러달라는 음악감독 토스카니니의 초청전보를 받았다. 전보는 그를 추켜세우며 친절함을 표현했고 샬리아핀은 미국의 선약 때문에 그걸 수락할 수 없어 아쉬워했다. 그들은 서로 만났을 때 존경을 감추지 않고, 상대방의 연주를 진심으로 즐겼다. 보리스 역은 결국 질리안스키에게 돌아갔다. 리허설에서 이 예술가는 악보에 없는 표현을 삽입했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봉이 쏜살같이 내려오고, 익숙한 불호령이 떨어졌다. 'Ma che! Ma che! cosa fai!' ('아니, 잠깐, 지금 뭘 하는 거요!') 질리안스키가 '마에스트로, 하지만 샬리아핀도 그렇게 하는걸요.' 라고 대답하자, 토스카니니가 쏘아붙였다: '샬리아핀은 위대한 예술가요[각주:3], 근데 당신은?'


토스카니니는 곧잘 신경질적으로 보였고, 지루한 인간과 머리통이 두꺼운 가수를 항상 경계했다. '기사장[각주:4]' 같던 그는 자신을 달래던 사람들에게 '나는 마에스트로요[각주:5]'라고 쏘아붙이곤 했다. 그가 라 스칼라를 다스리던 시절 무대 문지기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Oggi calmo'나 'Oggi tempesto'('차분한 하루', '지독한 하루')라고 적힌 기압계 눈금을 나눠주곤 했다. 아마 건강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는 평생 소화불량에 시달렸고, 그의 부인 칼로타는 항상 그의 곁에서 특식을 준비하고 그를 챙겼다. 페르틸레[각주:6], 스타빌레[각주:7], 두소리나 쟌니니, 바칼로니[각주:8]와 같은 부류의 몇몇 지적인 가수들을 토스카니니는 사려깊고 친절하게 챙겼다. 물론 대다수는 슬픈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번 받아들여지고 제 자리를 잡으면, 그는 친절하게, 거의 아버지처럼, 그들을 'figliuolo mio' ('귀여운 내 아들')이라고 불렀고; 단원들은 이걸 좋아했다. 그렇게 그들은 이걸 화가 가라앉은 배우자의 키스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질책은 항상 가치가 있었고, 그들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토스카니니의 친한 친구에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습관적으로 퉁명스럽고 다가가기 힘들게 만드냐고 물어봤다. 그는 천성이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곤 답변을 고쳤는데 아마 만성적인 소화불량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에서 날아와 라 스칼라의 <트리스탄> 공연을 담당했던 젊은 독일 연출가 레르트 씨[각주:9]가 있었다. 어느 이른 아침 극장 밖에서 눈물에 젖은 그를 만났다. '도저히 못 버티겠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어젯밤,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가 나를 데리고 새벽 세시까지 벼락처럼 리허설을 진행했어요; 그리곤 내게 전화를 걸어 몸 상태를 물어보더만 8시에 만나 추가 리허설을 하자는 거에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여길 빠져나가, 베를린으로 돌아갈 거에요.' 그가 마에스트로에게 말했다. 우리 뒤에서 나타난 그는 밝고 초롱초롱한 모습으로, 기가 죽은 레르트를 쳐다봤다. 'figliuolo mio'를 말하며, 그는 자신의 전화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덧붙이길 자기가 기고만장했고, 화를 풀어야 했는데, 레르트가 처음 눈에 띄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에스트로가 지나가자, 쏟아지는 만족감이 독일인의 표정을 채웠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허설의 타협 없는 조련사로서 토스카니니의 명성은 옳다. 하지만 그건 이탈리아에서 생긴 명성이다. 교향악 공연은 인기를 끈 지 오래되지 않았고, 관현악의 기준은 막 확립되고 있었다. 단원을 구슬리고 끌고 가는 습관은 그에게 짐이 됐을 것이다. 그가 유서 깊은 빈 필하모닉을 지휘할 땐 이런 게 적었다. 고민하건대 그곳이 긴 전통으로 확립된 단단한 조직이었고, 그래서 그가 경험했을 다른 집단보다 평균 연령이 눈에 띄게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총무 안톤 바이스는 흡족해하며 그들을 기다리던 불꽃 같은 첫 경험을 기억하며 몸을 떨었다. 첫 리허설이 끝나고 만났을 때, 그는 정말 놀라며 내게 '폭발'이 없었다고 알려줬다. 확실히, 숙련되고 반응이 빠른 베테랑과 그는 화기애애하게 일한 것이다. 안톤 바이스와 오케스트라 의장 부르크하우저는 토스카니니를 그들의 지휘자이자 후원자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그렇게 빈에서 시작된 일련의 관현악 공연은 잘츠부르크 축제의 오페라 공연으로 이어졌다. 수익금은 계속 증가해 오케스트라의 연금 기금이 눈에 띄게 쌓일 지경이었다. 1929년 스스로 라 스칼라를 떠나며 관현악 공연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그를 빈 오페라에 붙잡은 건 바이스와 부르크하우저에게 있어 큰 업적이다. 


토스카니니가 이끈 잘츠부르크 축제는 정말 성공적이었고, 그 사랑스러운 도시는 음악인의 메카가 되어 부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피델리오>, <팔스타프>, <마술피리>, <명가수>가 그의 오페라였다. 나는 공연과 리허설 대부분을 관람했고, 그걸 내 인생 가장 값진 경험으로 여기게 되었다.


잘츠부르크 축제는 잘츠부르크 행정조직,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오페라 합창 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그들의 지원으로 토스카니니는 원하는 대로 무대와 캐스팅, 연주를 꾸릴 수 있었다. 토스카니니는 노예처럼 일했고, 그 순간을 즐겼으며, 그걸 휴일이라 불렀다. 스타빌레, 바칼로니, 두솔리나 쟌니니처럼 의기상투하는 친구들, 그리고 빽빽한 총구와 국경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에서 자동차와 열차를 타고 브렌네르 고개를 넘어 잘츠부르크를 침공한 이탈리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1935, 1936, 1937 세 시즌간 주위를 맴돌았고, 그걸 굉장히 즐겼다, 하지만 항상 보석 같은 연주들을 녹음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바자르 카페의 라운지에서 위안을 취했는데, (...) 거기서 축제 기간 동안 녹음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힘든 결론을 내렸다. 가수들과 연주자, 그리고 극장까지 24시간 온종일 리허설과 연주로 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가수>를 고대했고, 게네랄 프로베  출입증이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모범시민들은 최종 리허설을 특별한 전유물로 여겼고, 아무런 지불 없이, 그들의 친구를 손님으로 초대해서, 가장 경제적으로 해묵은 빚을 풀곤 했다. 2,000명이 넘는 잘츠부르크 사람들이 리허설에 나타나 극장을 채웠다. 나는 칼로타 여사와 그녀의 사위 카스텔바르코 백작과 함께했다. 나는 그녀의 불안한 중얼거림을 들었다. '마에스트로는 꽉 찬 관중 속의 리허설을 분명 거부할 거에요.' 아니나다를까, 토스카니니는 잽싸게 포디엄으로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어둠 속에서 짜증을 느끼자마자, 지체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거리가 실망하고 화가 난 시민들로 꽉 차는 데는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극장이 텅 비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마음에 맞는 동료 사이에서, 토스카니니는 달변가가 된다. 이탈리아 방언이 얹어진 이야기 말이다. 파가니스 레스토랑이나 사보이 그릴에 있는 샬리아핀에게 달려가면, 그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둘 다 말하는 걸 즐기는 도사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은 스토리텔링의 기초가 아닌가).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에 매년 데려가던 오보에 연주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나폴리 사람이었는데, 상습적인 툴툴이가 되었고, 자신과 아내가 살아본 뉴욕의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돈을 더 받겠다고 볼멘소리를 한 것이다. 토스카니니는 이 친구의 고충을 들어줬지만, 돌아오자마자 그는 불평을 반복했고, 결국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부인이 발레에서 춤출 수 있소?'라고 토스카니니가 물어보며, 협조할 여지를 찾았다. 나폴리인이 뺨을 부풀리고 자기 팔을 솜씨 좋게 훑으며 코끼리 같은 아내의 몸매를 그렸다. '좋소,' 마에스트로가 응답했다, '그럼 부인을 합창단에 넣지.'


토스카니니에게는 세 가지 습성이 있다; 자기 구두를 직접 닦는다, 검정 토스카나 시가를 즐겨 피고, 자면서 이를 간다. 생플롱 급행열차에서 내 친구가 이런 기벽을 찾았는데 밀라노로 가는 오후 8시 20분 열차에서 그는 침대칸의 위층을 사용했고, 토스카니니가 아랫칸을 차지했다. 다음 날 아침, 국경의 기차역을 걸어내리며, 그가 '잠은 잘 잤소?'라고 물어보자 내 친구는, '나쁘지 않았죠. 더 좋을 수 있었는데 당신이 이를 가는 바람에요'라고 대답했다. 마에스트로는 웃으며, 괜찮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그의 검정 토스카나가 또 다른 방해요소라고 덧붙이지는 않았다. 


여기 유대인 박해와 독재에 용감하게 맞서는 토스카니니에 대한 멋진 영화 시나리오가 있다. 촬영되지 않고 아직 쓰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파블로 카잘스를 제외한다면, 어떤 음악가도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비싸게 치르진 않았다. 이야말로 그가 용기로운 사람 중 최 으뜸이라는 걸 보여줄 것이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말하길 뉴욕에서 토스카니니를 방문했을 때, 1933년 바이로이트 시즌을 맡아달라 요구하는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막 보낸 전보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1930년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그해 지크프리트가 죽자 1933년 시즌까지 돕겠다고 미망인에게 약속했다. 물론 당시 그는 나치 당의 집권과 반유대주의 정책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바이로이트에 복귀하는 건 정의에 대한 그의 모든 감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라이슬러는 그가 호텔에 들어갔을 때 마에스트로가 바그너, 바이로이트, 그리고 바그너 일가와 찍은 사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비니프레트가 선물한 마스터[각주:10]의 초고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함께 거절하는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에게 이건 쓰라린 기억이 되고 말았다.


시나리오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가 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성공적인 시즌을 묘사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게 유대인을 돕기 위해, 지휘 수당까지 포기하며,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1938년 시즌에 돌아오기로 약속했고, 이걸 위해 단호하게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친구 루이스 스털링 경을 방문해서 자신의 의사를 말했을 때, 그는 유럽의 심각한 정치 상황을 생각하며, 그 무모한 시도를 막으려 했다. 토스카니니를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건 루이스 경이 팔레스타인의 랍비장 헤르츠 박사에게 연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운 좋은 경우였다. 박사가 크로이던 비행장을 떠나기 몇 분 전에 연락해, 그는 토스카니니에게 정치 불안을 생각해서 투어를 그만두라고 단호하게 명령할 수 있었다.


이런 에피소드에 우리는 토스카니니가 자신의 조국을 결국 떠났고, 특히 이탈리아 정부의 출국 금지와 자산 동결로 인해 그가 고초를 겪은 사실을 추가해야 한다. 그는 사실상 자기 집에 갇힌 죄수였다. 결국, 그는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고, RCA 회장이자 라디오를 위해 NBC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계약을 성사시킨, 데이비드 사르노프를 국경에서 만나 가족과 함께 아브르[각주:11]로 향했고, 뉴욕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는 1939년 루체른 축제에 복귀했고, 전쟁이 발발해 결국 그곳에서 고립되고 만다. 그는 보르도에서 1939년 10월에 출항한 조지 워싱턴호에 탑승한 오천여 명의 벌벌 떠는 승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여정 동안 자기 선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1943년 3월 25일에 76살이 되는데, 모든 측면에서 그는 여전히 강해지고 있다. 토스카니니와 직접 계약한 곳은 그라모폰 주식회사다. 빅터 사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NBC 오케스트라와 독점 계약을 맺고 있고, 이를 통해 그들은 카탈로그에 그의 이름을 즐겁게 올리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그라모폰 사는, BBC 오케스트라와의 계약을 통해, 몇몇 뛰어난 녹음들을 발매 중인데, 여기에는 1937년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1번과 6번, 1939년 녹음된 교향곡 4번과 레오노레 서곡 제1번이 포함된다. 이들을 녹음할 때 기술진은 최상의 인내와 준비를 요구받았다. 그는 절대로 (녹음) 기계에 맞춰달라 요구받지 않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내 책 The Music Goes Round에서, 나는 어떻게 BBC의 오웬 마세를 도와 토스카니니가 그들의 1937년 음악제에 전념하도록 도왔는지, 그리고 스튜디오 녹음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와 특히 몇몇 실황이 어떻게 녹음되었는지 적었다. 매번 팀파니스트가 천둥같이 팀파니를 칠 때마다 기술진이 심장마비를 겪었는지, 혹은 여린 첼로 악절에서, 토스카니니가 흥얼대는 멜로디가 독주를 덮었는지 말이다. 피아니시모는 디스크에 녹음될 수 없게 들리곤 했고, 혹은 포르티시모들은 디스크에 커다란 흠집을 내놓곤 했다. 물론 이런 모든 걸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지휘자의 천재성을 미래에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작품 목록이 남게 되니 말이다. 


프레드 가이스버그, 1943년 6월 그라모폰


열심히 옮겼는데 마지막엔 자기홍보... 그라모폰지의 족보를 모르지만, 음반사와 관련이 있는 잡지였다면 이런 결말도 물론 이해는 합니다.


2017년은 토스카니니 150주년이죠. 여러 발매와 기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그라모폰에서 나온 기사를 몇 개 옮겨볼까 싶어요.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황색언론 노먼 레브레히트조차 경의를 표하는 '아버지' 프로듀서입니다. 엔리코 카루소의 '첫 앨범'으로 시작해서 1938년 나치가 쇄도하는 빈에서 브루노 발터의 말러 9번을 녹음하며 끝이 나는 이력은 그 자체가 황금기를 표상하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전권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던 월터 레그나 존 컬쇼와는 분명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죠. 어쩌면 그래서 토스카니니와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1. 1902년 초연된 알베르토 프란케티의 2막 오페라 [본문으로]
  2. 러시아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 [본문으로]
  3. Ma Chaliapin e un grande artista [본문으로]
  4. Commendatore [본문으로]
  5. Mi chiamo Maestro [본문으로]
  6. 이탈리아의 테너 아우렐리아노 페트릴레 [본문으로]
  7. 이탈리아의 바리톤 마리아노 스타빌레 [본문으로]
  8. 이탈리아의 베이스 살바토레 바칼로니 [본문으로]
  9. Herr Lert; 오스트리아의 작가겸 연출가 에른스트 레르트 [본문으로]
  10. 리하르트 바그너 [본문으로]
  11. 르 아브르. 프랑스 북부 도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