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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대전시향 마스터즈 시리즈 7 (리게티, 베토벤) - 2017년 7월 7일 대전예술의전당

by Chaillyboy 2017. 7. 19.


죄르지 리게티: 분기들 (1968)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Op.61 (1806)
(앙코르) 
외젠 이자이: 바이올린 소나타 2번 Op.21 “자크 티보" 中 1악장 (1923)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제5번 Op.67 (1804-08)

바이올린: 얀 므라첵 
세이쿄 김, 대전시립교향악단 

2017년 7월 7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대전광역시  
  

 

대전시향이 리게티를 연주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분기들, 혹은 라미피카시옹을 연주하기 위해 12대의 현악기가 지휘자를 두 개의 그룹으로 뭉쳐 둘러쌌다. 세이쿄 김이 불레즈를 연상시키는 동작으로 지휘를 시작했다[1]. 차분한 동작 때문인지 단원들은 훌륭하게 제어되었다. 하지만 음향은 시종일관 밋밋했고, 따라서 집중도 어려운 연주였다. 요컨대, 감상의 구심점이 될 지점이 없는 연주가 아니었을까. 이 곡을 대표하는 귓골을 긁는듯한 현악기의 보잉이나 악기군의 엇갈림에서 나오는 ‘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탓만은 아니겠지만, 관객들은 연주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좋아하지 않지만, 얀 므라첵의 연주는 그런 호불호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중부유럽 바이올리니스트의 투명한 음색을 가진 얀 므라첵은 집시풍의 리듬감과 초절기교로 연주를 주도했다. 실제로 음색보단 밋밋한 곡을 끌고 가는 강력한 에너지와 젊은 과감함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유사한 음색의 빌데 프랑과는 바라보는 지점이 다른 연주였을 것이다. 어쨌든 실황에서 보고 싶은 연주는 전자에 가깝기 때문에, 졸지 않고 흥미롭게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청할 수 있었다.  

반주 역시 흥미로웠다. 세이쿄 김은 프로필과 인터뷰 등에서 자신이 아르농쿠르 등의 시대악기 해석가를 존경하며 이번 연주에서도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할 것이라 언급했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양 날개에 배치했고, 비브라토를 극도로 절제하는 연주를 선보였다. 이 모든 게 실황에서는 제대로 된 효과를 못 내고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협주곡 반주의 경우는 기대 이상으로 그가 바라는 사운드를 선보인 것 같았다. 

무능한 호른은 언제나 그러하듯 분위기를 모르고 질러댔고, 팀파니와 트럼펫의 앙상블이 불안했다는 점 등이 눈에 띄게 아쉬웠지만, 현악 밸런스는 훌륭했고, 양익배치임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음향 환경을 뚫고 그럭저럭 단단한 ‘절충주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합주력이 나아진 3악장에서는 정말 훌륭한 반주를 보여줬다. 이외에도 재밌는 점으론 이전의 대전시향과 다르게 목관이 서울 예술의전당 수준까진 또렷하게 들렸다는 점이다. 원래 목관의 역할이 큰 곡이긴 하지만, 특히 바순을 포함한 악기들이 정말 주도적으로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지휘자의 어떤 지시가 있었을까? 궁금하다.  

두 번의 카덴차에서 므라첵은 열광적인 연주로 청중을 몰입시켰고, 반응은 뜨거웠다. 그는 이자이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앙코르로 연주했는데, 어… 이거 정말 좋았다. 단순한 명인기를 넘어서 청중을 집중시키는 미세한 지점들을 잘 아는, 요컨대 분위기와 흐름을 잘 만들어내는 연주자 같았다. 앞으로 크게 될 연주자라고 확신했다. 

이어지는 베토벤 교향곡이 그렇게 구릴 줄 누가 알았을까. 우선, 현악 편성이 커지며 협주곡 때의 균형 잡힌 사운드가 거의 실종되었다. 세이쿄 김은 전반적으로 과장된 동작과 함께 저돌적인 템포로 지휘했는데, 순간순간 이해 안되는 템포 감속이 있었다. '쿨'함보단 어색함이 더 강한 시도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저돌적인 템포에 박자가 반 박자 밀리거나 새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이다. 무슨 테이프가 씹힌 느낌까지…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1부의 견고했던 앙상블까지 무너졌는데, 일반적인 연주에선 들을 수 없는 참신한 강조가 종종 있긴 했지만, 연주를 살릴 수준은 아니었다. 

분명한 비전과 목적지를 가진 연주가 이런 결과를 낸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나 그 비전이 내가 지지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테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에는 항상 보수적인 관습을 뚫어나갈 실력이 따라줘야 한다. 그게 아니면 그냥 좋은 거 따라 하는 아마추어 덕후랑 뭐가 다를런지... 물론 제일 슬픈 점은 이 정도의 가벼운 절충적 해석을 한국에선 새로운 시도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일 테다.

[1] 현대음악과 불레즈 비팅은 나름 연구대상이다. 처음엔 불레즈계 지휘자들(앙상블 엥테르콩탕포렝을 거친 맬키, 핀쳐 등등)만 그렇게 지휘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현음에선 그렇게 지휘하는 것 같다... 그게 가장 효율적인가? 그렇다면, 불레즈의 세례를 안 받은 지휘자 - 예컨대 로즈바우트와 길렌같은 독일계 지휘자 - 와 그들간의 비팅 차이는 어떤 해석차를 만들까? 혹은 관점의 차이가 비팅의 차이를 만든걸까? 위와 같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