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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파비오 루이지/KBS교향악단 & 임동혁 (모차르트, 브루크너) - 2018년 10월 14일 통영국제음악당

by Chaillyboy 2018. 10. 1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0번 K. 466 (1785) 

(앙코르) 

프란츠 슈베르트: 즉흥곡 D. 899, No.3 (1857) 


(인터미션)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 WAB 109 (1887-1896) 


피아노: 임동혁 

파비오 루이지, KBS교향악단 


2018년 10월 14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초점이 퍼진 음향에 익숙했던걸까. 명성이 자자한 통영 국제음악당의 첫 인상은 면도날을 박은 고구마에 가까웠다. 몸이 덜 풀린 오케스트라 앙상블이 더해지며 홀이 전해주는 음향에 쉬이 집중할 수 없었다. 형편없는 연주를 적나라하게 까발릴 것 같은 날 선 음향은, 아마도 현대음악에 바쳐진 공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테다. 모차르트는 서두르는 템포와 노골적인 강약 대비가 특징적이었다. 작품이 품고 있는 불안을 표면으로 끌어내려는 선택이었겠지만임동혁 역시 히스클리프를 떠올리게 하는 거칠고 깊은 격정을 보여줬다—한편으로는 오케스트라 편성과 공간의 직선적인 음향을 고려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었다. 현악 앙상블이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루이지의 해석은 기민하고 영리했으며, 특히 모차르트의 인장과도 같은 목관 앙상블을 진하게 살리며 임동혁의 구상을 효과적으로 보조해줬다. 이 지점에서 음악당의 미덕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다른 공간에선 느낄 수 없던 모차르트 관현악의 거미줄같은 짜임새가 항공사진을 보는 것 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임동혁의 연주를 콘서트홀에서는 처음 접했다. 일필휘지같은 연주에는 장점과 단점이 하나로 묶여있었는데, 그만큼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상상하고 완성한 채로 표현했다는 뜻일테다. 서울과 다르게 앙코르를 선보인 그의 심리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메인 프로그램에 더해진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세 곡을 관통하는 거대한 불안의 정서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줬다. 결국 오늘의 연주회는 앙시앵 레짐의 폭발하는 불안, 비더마이어 문화의 억압된 불안, 이중제국이란 용광로 속의 불안을 모두 보여준 셈이다.  


임동혁이 불안을 그대로 체현하며 작품의 정체성을 극적으로 발산시켰다면, 파비오 루이지의 지휘는 기술적으로 (그가 재직했던 젬퍼오퍼의 영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전통을 떠올리게 했다. 땀을 흘리는건 청중이지 지휘자가 아니라는 슈트라우스의 금언은 루이지가 오늘 보여준 단단한 카리스마를 그대로 말해준다. 살짝 앞선 템포로 시작된 루이지의 지휘는 극도로 간결하며, 효과적이고, 확신에 차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날렵하게 지휘를 따랐다. KBS에서 보기 힘든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특히 감탄한건 루이지의 왼손 테크닉이었다. 자유로운 오른손의 박자를 보완하는 정밀한 치고끊음과 악상의 표현은 보는 내내 감탄스러웠다. 브루크너 9번을 들을 때는 습관적으로 눈을 자주 감곤 했는데, 오늘은 연주 내내 지휘자를 지켜보며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루이지의 정밀한 테크닉은 무엇을 보여줬을까. 그가 보여준 미덕 중 가장 놀라웠던 점은 완벽에 가까운 음향 밸런스였다. 각 악기군이 두드러지지 않으며 서로의 음향을 완성하는 연주. 상호구성적인 음향. 서로의 인프라(infrastructure)가 되어주는 음향들. 카라얀의 말을 빌리자면 실내악적인, 아바도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를 듣는 오케스트라가 이런 것일까. 방해없는 공간의 음향이 오케스트라 기초체력, 예컨대 악장과 나머지 1바이올린 사이의 불균질함과 같은 한계를 드러냈지만, 이런 훌륭한 음향 특성 덕분에 한계가 나의 몰입을 막지는 못했다. 금관 코랄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비올라의 트레몰로. 현악 총주 트레몰로를 완성하는 플룻의 진한 텅잉. 그렇기에 2부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할 말이 없어진다. 특정 부분의 부분을 꼽기에는 많은 악절과 리듬이 서로에 의존하며 커다란 전체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영의 날 선 음향이 드러낸 루이지의 구상은 정교하게 작동하는 시계, 혹은 거대한 로봇의 모습에 가까웠다. 전통적인 극적 구성과 거리가 먼 연주였음은 분명하다. 변곡점 이전에 급격히 템포를 치고 올라오는 시도가 그렇다. 요컨대 눈물샘이 준비되기도 전에 클라이막스에 도달해버리는 시도일테다. 이는 청중을 울리지 않지만, 청중을 압도하는 연주였다. 그리고 청중을 압도한 것은, 루이지와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그들이 또렷하게 재현한 교향곡 그 자체였다. 루이지가 KBS의 상임이 되지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