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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TSO 마스터 시리즈 "말러, 부활!" - 2019년 10월 25일 가오슝국가예술문화센터

by Chaillyboy 2020. 2. 6.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2번 (1888-1894)

 

소프라노: 라헬 하르니슈

콘트랄토: 카타리나 마기에라

엘리아후 인발, 타이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가오슝 실내합창단, 청운합창단

 

2019년 10월 25일, 웨이우잉국가예술문화센터 콘서트홀, 가오슝, 타이완

 

-지난 일정을 복기해 본다. 

 

퇴근 열차에 몸을 싣고 가오슝시로 향했다. 지하 통로로 두 번 환승하여 콘서트홀이 있는 웨이우잉에 도착했다. 타이완의 저녁 공기가 달궈진 몸을 가라앉히고 마비된 감각을 다시 제자리에 끌어다 놓았다.

 

지상에서 올라오는 낮은 광도의 인공조명을 무게로 압도하는듯한 문화센터의 먼 육체가 보였다. 외계 비행체를 떠올리게 하는 설계가 낯설지는 않았다. 외관을 덮고 있는 격자는 미래적인 느낌을 주면서 지상의 회색 보도블록과 조응했다. 길 없이 펼쳐져 있는 블록의 평원을 가로질러 문화센터에 진입했다. 인기척 없이 낮은 가로등만이 다가오는 밤으로부터 공간의 온기를 지켰다.

 

약 세 개 정도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들 사이의 야외 공간까지 거대한 지붕이 덮고 있는 구조였다. 건물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지붕 아래의 야외공간을 길게 걸어야 했다. 건물이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 유쾌하진 않았다. 권위적이고 객관적인 공간임을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건축물—재수학원이나 우리 대학의 도서관—을 보는 듯했다. 매표소 앞에서 관객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도쿄 산토리홀처럼 공연 시작 전에 출입문을 여는 방식이었다. 정겹고 선한 타이완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 이어져 계속 당황했다. 앉을 곳을 찾아 높은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광장이 우측에 보였다. 넓게 펼쳐진 광장의 전방, 센터의 지붕 너머는 밤어둠으로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광장을 채우고 있는 건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였다. 모두에게 허락된 피아노. 화강암의 정방형 의자들이 넓게 떨어져 피아노를 둘러싸고 있었다. 뜨문뜨문 사람들이 앉아있고, 그들 주위로 콘서트홀의 벽면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흘렀다. 피아노의 검고 매끈한 표면이 그런 풍경과 썩 어울려 보였다. 여백을 채우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민들의 피아노 소리가 기분을 심심치 않게 했다. 육중하고 미래적인 신전의 침묵에서 목가를 들은 듯했다. 타이완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시간이 되어 센터 내부로 진입했다. 어두운 색상과 낮은 광도는 건물의 외관과 비슷했지만, 훨씬 아늑했다. 곧이어 들어간 콘서트홀은 훨씬 다양한 색채로 눈을 밝혔다. 표면의 색상 자체는 마찬가지로 어두웠지만, 어둠을 빛이 뚫고 다양하게 굴절하며 시야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오르간은 연보랏빛으로 밝아져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적막한 콘서트홀을 첫 음이 꽉 채우는 순간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과 무관한 듯 희미하고 투명한 백색광이 등고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 또한 음악이 시각으로 구현된 듯했다. 

 

자리를 찾아 앉으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객석에 올라왔다. 이어 엘리아후 인발이 무대로 올라왔다. 작은 체구의 사내는 언제나 그러하듯 검정 셔츠와 짧은 블레이저를 갖춰 입고 포디엄에 성큼 섰다.

 

낮게 깔리는 트레몰로의 첫 진동이 가볍지 않았다. 정상파가 느리게 공간을 휘적이는 인상이었다. 순간이 그대로 멈춘 듯했다. 상승하는 악구는 힘겹게 시작되었는데 곧이어 놀랄만한 위력으로 가속되었다. 확신에 차 질주하는 관현악 음향이 객석을 강타했다. 건조하면서도 또렷한 콘서트홀의 음향디자인이 이를 보조했다. 오케스트라의 기술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결의에 찬 직선적인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죔쇠를 단단하게 죄고 연주에 임하는 듯했다.

 

단칼에 모든 걸 베어버렸고 순식간에 연주가 끝나있었다. 이런 연주는 내게 처음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마지막 음표가 끝나면 으레 있는 아쉬움도 한꺼번에 보내버린 그런 연주였다. 특히 3악장부터의 완급조절은 감탄스러웠는데, 악장 사이의 휴식을 최소화하며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개개 악장이 아닌 서로 대조해야 하는 단일한 구조를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긴장을 은근히 끌어올리며 피날레의 밀도를 최고조로 올렸다. 영적인 존재의 질량 없는 부활이 아닌, 무거운 지상의 것이 모든 걸 찢어발기며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감상을 마친 심장에 부담이 느껴졌다.

 

마치 뵘의 실황을 듣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튀어 오르는 뵘의 실황과는 전혀 다른 느긋한 기운이 도처에 흘렀다. 일필휘지 속에서 느긋함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분명 집중이 흐트러질 순간도 많았다. 인발은 작곡가의 지시를 우직하게 따르며 첫 악장을 마치고 5분가량의 휴식을 취했다. 정신없는 흐름을 좇아가던 연주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 5분조차 인터미션이 아니라 쉼표가 되어 연주에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전히 인발의 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악장의 느긋한 템포, 그리고 주변과의 대조는 작품의 균형점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시도할 수 있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인발의 지휘는 무뚝뚝하지만 재치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에너지를 제어해야 하는 정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수가 적은 지휘법. 오케스트라는 비팅의 빈 공간을 성실하게 채워갈 줄 알았다. 그곳을 채운 것은 일류 오케스트라의 명인기라기 보다는, 지휘자와 쌓은 신뢰임이 분명했다.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콘서트홀을 나서 다시 주변을 걸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관객들이 차츰 제 갈길로 흩어졌다. 가는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로 향하기 위해 다시 문화센터의 광장을 스쳐 지나갔다. 같은 공연을 본 듯한 어린 학생들이 피아노에 모여들어 있었다. 쇼팽의 야상곡과 베토벤의 아다지오 칸타빌레가 유려하게 연주되었다. 예상치 못한 서정에 놀라 오래 서있었다. 음악과 웃음. 행복한 소리가 오늘의 모든 사건을 가라앉혀 시간의 저편으로 보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