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arr. 불레즈) : 권두곡(1918, 1987/2007)
루치아노 베리오 : 신포니아(1968)
찰스 아이브스 : 대답없는 질문(1908/35)
(1부는 끊김없이 연주됨)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Op.77
(앙코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이올린 무반주 파르티타 1번 BWV1002 中 사라방드-두블
중창 : 노이에 보칼솔리스텐 슈트트가르트
바이올린 :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데이비드 로버트슨,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2023년 3월 31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개막일 특유의 분주하고 들뜬 분위기가 국제음악당을 감싸고 있었다. 19세기 고전 소설에서 묘사되는 극장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흐름 속에서 주인공이 극장에 도착하고 인간관계들이 바람맞은 먼지 더미처럼 가볍게 상승하고, 사교계의 주인공이 들어오면서 더 번잡해진 극장의 불이 꺼지며 서서히 분위기가 식혀진다. 객석의 들뜸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경쾌하지만 어딘가 강박적인 걸음걸이로 잽싸게 무대에 등장했다.
잠깐 오늘의 오케스트라 배치를 언급하면 좋을 것 같다. 베리오의 신포니아를 위해 지휘자의 포디엄을 8명의 가수가 반원으로 둘러싸고, 그 뒤에 오케스트라가 위치한다. 다양한 디테일이 있었지만 무대의 반대편 끝 벽면에 바이올린의 일부가 일렬로 위치한게 특별히 눈에 띄었다.
라벨의 권두곡이 곧바로 연주되었다. 라벨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이색적인 곡이 아닐까. 불레즈의 편곡은 처음 들어봤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 얽매인 곡을 훨씬 더 풍성한 음향공간으로 확장한 느낌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들떠있던 객석의 분위기가 서서히 차분해지는 속도와 비슷한 템포처럼 연주가 느껴졌다. 그 분위기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는 순간 깊은 공(Gong) 소리로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의 연주를 예습하면서 이 사람의 탁월함에 여러 번 놀랐다. 흐름과 음색을 세심하게 조절하고, 특유의 분석력으로 관행에 물들지 않는 음향을 들려준다.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진 오늘의 지휘 역시 그러한 장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는 태도로 연주가 꼬일 여지가 있는 부분마다 또렷한 동작으로 연주자를 이끄는 모습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저런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곡이든 연주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편하게 귀만 기울이고 있는 내게까지 전달되었다.
그가 베리오의 신포니아를 그렇게 깔끔하게 풀어나갈 줄 몰랐다. 2층 앞자리에서 들은 내게 이 곡의 음향은 절묘한 균형으로 악기와 목소리가 융합된 무언가였다. 이는 예컨대 인성을 또렷하게 분절시켜 파트간의 구조와 작용을 훌륭하게 드러낸 퐁스/BBC심포니(Harmonia Mundi)의 연주와도 다르고, 연주 흐름을 완벽한 수준으로 다듬어낸 페테르 외트뵈시/예테보리 심포니(DG)의 연주나 주빈 메타/빈 필하모닉의 실황(미발매)와도 다른 접근법이었다.
풍성하고 꽉 찬 세계가 여유럽게 흘러간다. 그가 다채로운 음향의 권두곡에 신포니아를 이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1악장과 2악장의 대비는 선취된 흐름 속에서 충격력은 덜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3악장은 콜라쥬 덩어리(과거)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보단 꿀럭거리며 부드럽게 지금(2023년)을 잠식해갔다. 베리오에 의하면 3악장의 말러 스케르초는 이 곡의 뼈대가 된다고 하는데, 스케르초의 템포를 이렇게 골랐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도가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될 것이다. 땡큐, 미스터 로버트슨.
과거의 세계가 지나간 4, 5악장은 지금(1968년)의 음렬와 목소리들이 나타난다. 개별 악장으로서의 훌륭함보다는 3악장의 여운을 붙잡은 채로 향하는 종결부의 미덕이 있었다.
과거와 지금의 거대한 물결이 잦아들 즈음 조용하게 밝은 고대의 화음이 이어졌다.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베리오의 신포니아가 그 절대영도의 황홀함을 더 부각시켰을지 모르겠다. 적막 속에서 불안을 깨우는 목관과 금관이 꽤나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세 곡을 탁월하게 이어나간 이 연주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진걸까?
한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는 그가 바흐 이후 얼마나 탁월한 음악가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카바코스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나는 몇 일 전 빈에서 연주된 같은 곡 실황(블롬슈테트/빈필)을 들어봤는데, 내가 판단하건대 통영에서 선보인 연주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카바코스가 안정적으로 연주를 선보이는데는 로버트슨의 반주도 한 몫 했다. 로버트슨은 여유있는 템포로 카바코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가며 그의 독주를 보조했다. 반주 자체의 역량도 훌륭했지만(식상할만큼 많이 연주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마치 어제 초연된 곡처럼 느껴졌다), 카바코스가 곡과 연주를 장악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었다. 사소한 디테일들이 주는 감동이 있었다. 예컨대 카바코스는 짧은 트릴 만으로 청중을 감동시킬 줄 아는 연주자이다. 단단한 자세로 곡에 밀리지 않으면서 초절기교에 자신의 해석을 더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드는 감탄이 있었따. 2악장과 3악장에서는 그가 바흐를 연구하며 얻었을 지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밀림 없는 피날레와 환호 속에서 카바코스는 바흐의 파르티타 1번 사라방드-두블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숙소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현인의 평을 옮기면서 후기를 마쳐본다. 그것은 "끝날듯 끝나지 않은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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