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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더 마스터 시리즈 II <백건우와 슈만> - 2020년 11월 13일 인천서구문화회관

by Chaillyboy 2020. 11. 14.

   

로베르트 슈만: 아베크 변주곡 Op. 1 (1829-30)

로베르트 슈만: 세 개의 환상작품집(환상 소품) Op. 111 (1863)

로베르트 슈만: 아라베스크 Op. 18 (1839)

 

(인터미션)

 

로베르트 슈만: 다채로운 소품집 Op. 99 中 (1834-49)

                           4. 매우 느리게

                           5. 빠르게

                           6. 약간 느리게, 충분히 노래하듯이

                           7. 매우 느리게

                           8. 느리게

로베르트 슈만: 어린이의 정경 Op. 15 (1838)

로베르트 슈만: 유령 변주곡 WoO 24 (1854)

 

피아노: 백건우

 

2020년 11월 13일,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인천광역시

 

 

가정동에 위치한 인천서구문화회관에서 백건우의 리사이틀을 보았다. 짙은 안개와 인접한 건물의 검파랑 네온사인이 문화회관을 숨겨놓은 듯했다. 육교 두 개과 맨션단지를 급하게 가로질러 공연 시간을 겨우 맞췄는데, 숨을 고르지 못해 1부 감상을 망치겠다는 우려와 다르게 문화회관의 차분한 분위기가 몸을 빠르게 식혀주었다.

 

백건우에게서 고목처럼--노년의 리히터가 보여준 것같이--강렬한 인상을 느꼈다. 악보를 팔에 끼고 무뚝뚝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는 자세를 고른 뒤 아베크 변주곡으로 연주를 시작했는데, 그 군살 없는 존재감이 변주곡의 첫 옥타브에도 그대로 투영된 듯했다. 첫 반복구를 펼침화음으로 사뿐하게 연주하는 모습에서 오늘 공연에서 어떤 아쉬움이 있어도 이를 크게 보상할 무언가가 있겠거니 확신했다.

 

슈만의 초중기와 후기 작품이 한 곡씩 교차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이 짜였다. 이 경우 다양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정열과 몽상을 반복해서 오가는 슈만적 형식을 프로그램으로 구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초기 슈만의 단단한 골격을 풀어헤쳐 말년의 예견된 광기를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후기 슈만의 어지러운 세계에서 펼쳐진 악상을 끌어모아 그의 앞선 작품에 빗대어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내면의 스산한 바람을 끌어모으는 슈만의 세계를 그는 어떤 소리로 표현할까.

 

리듬의 엄격함을 약하게 풀고 정갈하게 노래하는 연주에서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어린이 정경의 화법이 떠올랐다. 보조 성부가 살며시 가라앉으며 칸타빌레를 드러내고, 후기 슈만의 풍경에서 선율의 내러티브를 분명하게 이어나가게끔 도왔다. 모서리가 시간의 흐름에 깎여 자연스럽게 무뎌진 듯한 목소리. 진하고 영롱한 자기 음색의 본령을 허름한 외양으로 숨기고 과시하지 않는 자세는, 음악을 진지하게 탐구하던 피아니스트의 오랜 경력을 관통하는 인격과 닮아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프로그램으로 먼저 발매된 슈만 앨범에선 앞서 말한 허름한 가림막을 그가 벗어던진 채로 청아하게 노래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며 1부의 마지막 음표를 들은 것 같다.

 

울림을 키우고 왼발을 통해 정교한 톤 컨트롤을 시도하는 모습에서 2부의 변화를 감지했다. 리듬이 눈에 띌 만큼 풀어져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를 희생해서라도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피아니스트의 강한 의지에 설득되었다. 저음 성부의 톤 변화를 통해 제목 그대로 다채로운 소리의 향연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터미션만 사이에 두고 모든 곡이 잠깐의 숨 고름으로 연결되었기에 어린이 정경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연주가 흘러갔다.

 

6번째 곡 <큰 사건>에서 '큰 변화'를 감지했는데, 색채를 그리던 저음부가 뒤로 빠지며 씩씩한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풍성한 페달 사용이 강하고 명료한 선율을 지나치게 울린다 생각했는데, 웬걸 이 급작스러운 변화가 울림만 조금씩 덜어내며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트로이메라이>에서 이렇게 생기 어린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돌이켜보면 어린이의 꿈은 노스탤지어보단 발랄한 에너지와 호기심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희미한 회상조의 풍경을 순식간에 걷어내고 유년기로 뛰어간 시도는 그 자체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확신에 찬 시인의 음성이 희미해지는 순간까지 서서히 그 시도에 설득되어갔다. 

 

어린이 시인과 유령 사이의 말 없음이 깊어지는 순간 마지막 변주곡이 시작되었다. 슈만의 생기가 사라지는 순간에 쓴 마지막 곡이 확신에 찬 진군처럼 느껴지던 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끝을 향해 힘겹지만 뚜벅뚜벅 걸어가는 듯한 백건우의 연주가 강렬하게 느껴지던 까닭은 종말을 거부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저 걸어갈 뿐이라는 어떤 태도를 본 것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곡의 마지막 울림은 급작스레 흩어졌고 침묵이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