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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해리 파치 : 플렉트럴과 타악기 춤 - 23년 통영국제음악제 1일차

by Chaillyboy 2023. 4. 1.

 


해리 파치 : 모래 언덕의 다프네(1958/68)
해리 파치 : 플렉트럼과 타악기 춤(1952)

파치 앙상블
2023년 3월 31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통영시

해리 파치는 한국에서는 '해리파치, 라 몬테 영.. 알아 몰라?'로 유명할 것 같다. 작곡가의 유파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자세한 사전 조사 없이 공연장으로 향했다. 무대를 꽉 채운 다양한 악기들이 시선을 채웠다. 그 풍경이 꽤나 이국적이었지만 한편 이 악기들은 그저 목적이 있어 만들어졌다는 듯한 국적없는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곧 연주될 곡들이 (당시 개념으로 말하자면) 제3세계의 다양한 음향을 가져와 사용하긴 했지만, 그게 특별히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소리들은 제목과 구성이 지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어떤 세계를 향하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감상자의 측면에서 말해보자면, 선구적인 곡이 가지는 한계와 타악기 앙상블이 가지는 한계를 벗어나는 연주는 아니었다. 특유의 참신한 음향은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보조받지 못했다. 음향이 새로움이라는 무기로 귀에 호소했지만 이는 시간이 흐르며 단조로움으로 바뀌었다. 연주의 문제는 아니었지 싶었다. 당대의 참신함을 지금 여기서 되살리기에는 연주자가 재량과 기지를 불어넣을만한 여지가 많은 곡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곡을 지금 여기 재현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되는 세팅이니까(무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초기 '동시대 미국'의 풍성하고 날카로운 지적 세계를 짧게나마 훓고 온 느낌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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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로 열린 해리 파치 워크숍에서 들은 내용을 내 생각과 함께 간단히 붙여본다.

해리 파치는 12음계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43음계를 만들었다. 앙상블 리더 존 슈나이더에 따르면 인간은 한 옥타브 사이에서 500개가 넘는 음정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음계를 만든다고 할 때 12음을 기준으로 적은 음을 쓰거나 많은 음을 쓸 수 있겠다. 왜 파치는 많은 음을 쓰기로 선택했을까?

이어서 공연에 사용된 악기들을 소개받았다.

해리 파치가 최초로 제작한 악기는 adapted viola(번역어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그대로 옮긴다)인데, 비올라 바디와 첼로의 넥, 바이올린 현(1 옥타브 낮은 튜닝)을 조립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10현 기타와 6현 기타가 쓰였다. 이 악기들은 현이 모두 같은 음으로 조율되어 있었는데, 파치는 이렇게 기타를 조율하면 슬라이드 사운드를 낼 수 있고, 그 소리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어딘가 이국적인 소리가 났다). 비올라와 기타 모두 43음계 연주를 위해 넥에 무지개 빛 물방울들이 어지럽게 입혀져있었다. 기타의 경우 넥의 왼쪽면에 분수가 어지럽게 적혀있었다. 무지개 무늬와 마찬가지의 목적일 것이다.

이외에 다이아몬드 마림바(1차원으로 건반?이 배열된 일반 마림바와 다르게 2차원으로 다양하게 훓을 수 있음)와 55Hz의 콘트라베이스 마림바가 인상적이었다. 이들 마림바 타악기들이 해리 파치 사운드의 핵심이라는 인상이었다.

정말 이국적인 악기는 2차 세계대전 전함 함포의 탄피로 만든 Spoilers of War(타악기)와 입자물리학에서 사용되는 구름상자의 부픔으로 만든 Cloud Chamber Ball(타악기)이었다. 특별한 소리가 인상적이었으나 한편 이 대목부터는 왜 파치의 음악이 왜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예컨대 중국 제의에 사용되는 도구를 이용해 만든 Chinese Prayer Ball의 경우 원래 재료에는 금이 입혀져 있었다고 하니... 이런 악기는 다른 작곡가들이 사용하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후대의(혹은 당대의) 다른 작곡가들이 파치의 악기를 사용해 곡을 쓴 적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워크숍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파치가 본인을 "목수 일에 매혹된 철학적 음악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해리 파치의 음악 세계를 잘 정리해주는 표현이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