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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김선욱/로버트슨의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II - 23년 통영국제음악제 2일차

by Chaillyboy 2023. 4. 5.

 


윤이상 : 교향악적 정경(1960)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앙코르)
프란츠 슈베르트 : 즉흥곡 D. 899 No. 3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제1번

피아노: 김선욱
데이비드 로버트슨,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2023년 4월 1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올해 음악제의 주인공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일지도 모르겠다. 게이츠헤드의 로열 노던 신포니아가 통째로 합류한 오케스트라는 매년 보여주던 수준을 아득하게 벗어난 합주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오케스트라는 이미 기억에 남을 축제의 순간을 만들어왔다. 2021년에는 세상 모든 연주를 갖다 대어도 전혀 꿀리지 않을 베토벤 교향곡 8번을, 2022년에는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브루크너 7번 교향곡을 선사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건 아닐 것이다. 후자의 경우 모 언론에서 심사위원 투표를 거쳐 그 해 최고의 공연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

오늘 콘서트는 윤이상의 '교향악적 정경'으로 시작되었다. 제대로 예습을 안 하고 갔는데 기교적으로 이렇게 까다로운 곡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년보다 살짝 밝아진 오케스트라의 단단한 음색으로 이 곡이 '편하게' 연주되는걸 듣고 있자니, '연주'라는 땀냄새가 나는 단어보다는 '집행'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로버트슨의 리더십과 정교한 비팅이 합주력을 끌어올리기도 했지만, 모든 섹션이 마치 현악 사중주 단원들처럼 긴밀하게 반응하는데는 오케스트라의 기량 자체가 달라진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곡 자체는 윤이상의 머리 속 다채로운 음향 공간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구성이라 흥미로웠으며, 젊은 작곡가가 심혈을 들여 만든 포트폴리오라는 인상도 있었다.

이어서 김선욱이 무대에 올라왔다. 나는 김선욱의 여정을 즐겁게 따라가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김선욱의 선택들에는 지지한다는 단어를 항상 붙이고 싶어진다. 그 선택에는 어떤 곡에 대한 해석이 들어갈테고, 그가 선별하는 레퍼토리 또한 들어간다. 예를 들어 그가 근래에 연주한 협주곡을 살펴보면 리게티, 브람스 2번, 바르톡 2번, 번스타인(!) 등이 눈에 띈다. 이 사람은 항상 편한 선택을 마다하고 모종의 이유로 험한 길만 걸어간다는 인상이다. 대체로 그 이유에는 예술적 탐험의식과 섬세하게 쌓아왔을 취향 등이 들어가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나는 김선욱의 예술가로서의 선택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연주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앞서 서술한 관점에서는 험한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명한 곡이니까. 칸타빌레와 코다의 폭발만 잘 살려도 환호가 나오니 정형화된 '웰메이드' 레시피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피날레를 잘 연주해서 박수는 보장되어있었다(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물론 전자는 힙스터적인 관점이고 후자는 불경한 생각이거니와, 사람들이 그에게 항상 브람스와 베토벤(만)을 기대한다는 사실도 같이 겹쳐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김선욱은 여기서도 곡으로 험한 길을 택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는 연주에서도 험한 길을 택할 것인가.

단단하게 정제된 타건에서 색다른 세계가 다가옴을 느꼈다. 종소리를 묘사한 도입부는 셈여림이 섬세하게 조절되다가 어느 순간 콘서트홀에 단호하게 무언가를 외친다는 인상이었다. 김선욱의 연주는 왼손의 울림을 절제한다는 측면에서 통상적인 라흐마니노프 해석과 달랐다. 2악장과 3악장의 빠르기 설정에서 연주가 얼마나 섬세하게 설계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빨라진 반복구는 구조적인 해석 아래에 깊은 감수성을 숨겨놨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연주에서 깊은 감동을 느꼈다. 김선욱은 집요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2부에 연주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은 아마 망한 걸로 제일 유명한 곡일 것이다. 혹은 망한 곡 중에 제일 유명한 곡이라 불러도 되겠다. 내가 이 곡에 가진 기대치가 워낙 낮았는지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곡에 짜임새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곡이 허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두서없는 3악장도 문제였지만, 4악장의 공(Gong) 연출은 실소를 부르기도 했다. 똑같은 악기가 베리오의 신포니아에서도 쓰였을텐데 그 때 들은 심오한 소리는 어디가고 무슨 코미디 연출같은게 되었는지.. 훌륭한 연주마저도 허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