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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세르게이 말로프 리사이틀 - 23년 통영국제음악제 7일차

by Chaillyboy 2023. 4. 1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세르게이 말로프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6번 BWV 1012 (어깨첼로, 전자 바이올린과 전자음향 연주)
(앙코르)
세르게이 말로프 : 항구의 소리를 모사한 즉흥연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BWV 1006 中 사라방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음향을 재현)

어깨첼로, 전자 바이올린과 루프스테이션 : 세르게이 말로프

2023년 4월 6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태풍이 지나가듯이 연주회장을 단숨에 휘감고 사라져버린 즉흥연주에 대해 무어라 평을 해야할지 참 당혹스럽다. '덧없기에 아름다움' 따위의 식상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우선 공연의 외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많은걸 남겨봐야겠다.

무대에는 이팩터처럼 보이는 전자기기들이 바닥에 가지런히 모여있고, 객석 기준 이팩터 왼쪽에는 색이 화려한 바이올린 케이스가 의자 위에, 오른쪽에는 어깨첼로가 선반 위에 놓여있었다. 이미 전자음향과 한 몸이 된 대중음악 콘서트의 거대한 설비와 다르게 이 모습에는 어딘가 소박한 인상까지 있었다. 하지만 항상 자연음향의 보루처럼 남아있는(물론 이것은 어느정도 현혹이기도 하다) 콘서트홀에 전자설비가 등장한 것은 그 자체로 인상적인데다가, 작게 모여있는 이러한 시각적 인상이 바흐의 첼로 모음곡가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공연 전 방송안내가 끝나고 콘서트홀의 불이 꺼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천장 쯤에서 소리가 들려서 미리 녹음한 음원을 스피커로 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전자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세르게이 말로프가 내가 앉은 좌석 옆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검정 프린팅 티에 톤을 맞춘 블레이저를 입은 세르게이 말로프는 무대의 자기 자리로 올라가 연주를 마저 마쳤다. 뻔한 묘사 같지만 클래식 음악가보단 흡사 락커의 모습에 가까웠다.

말로프의 연주는 어깨첼로와 전자 바이올린을 번갈아가는 구성이었는데, 루프스테이션으로 이들의 음향을 한꺼번에 선보이기도 했다. 먼저 어떤 악기의 악구나 음향을 연주하면서 같이 루프로 녹음하고, 바로 악기를 바꿔 음향을 겹치는 식이었다. 이를 통해 말로프는 바흐의 다성적 구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동시에 현악기가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음향을 자유자재로 선보였다. 어쩌면 바흐의 곡이기에 가능한 방식의 연주일 수 있으나, 바흐라는 틀을 뛰어넘는 훨씬 자유로운 구상과 세계관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콘서트홀 예술가가 항상 가지는 재현과 창조 사이의 딜레마에서 놀라운 길을 보여준 셈이다. 

말로프는 그럼에도 원곡의 흐름 자체는 충실하게 따라가는 편이었는데, 이것 역시 어찌 보면 바흐에 걸맞는 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곡의 악상을 쪼개서 즉흥하면서도 곡의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연주 내내 일관성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작부터 허를 찌른 그의 연주는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 가량 이어지다 단숨에 끝났다. 말로프는 이러한 구성에 영감을 준 누구를 기린 다음(몇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다양함이 섞이는 항구를 언급, 곧바로 그것을 묘사하는 기묘한 앙코르를 선보였다. 낮게 깔린 자연음향에 가까운 현악기 소리에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웃거나 당혹스러워하며 열린 분위기의 분주한 음향을 감상했다. 이 항구소리가 조금 전의 바흐와 정확히 동일한 기법으로 연주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치 이 앙코르가 오늘 연주회의 해방감을 완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