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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김선욱, 앙상블 모데른 - 23년 통영국제음악제 7일차

by Chaillyboy 2023. 4. 10.


드뷔시/첸더 : 다섯 개의 전주곡(1991/97)
  - 돛(Voiles)
  - 요정 퍽의 춤(La danse de Puck)
  - 괴짜 라빈 장군('General Lavine', eccentric)
  -  눈 위의 발자국 (Des pas sur la neige)
  - 아나카프리의 언덕(Les Collines d'Anacapri)
리게티 : 여섯 개의 피아노 에튀드(1985-2001)
  - 얽힘(Entrelacs, 2권 6번)*
  - 흰색에 흰색(White on White, 3권 1번)*
  - 개방현(Cordes a vide, 1권 2번)**
  - 금속(Fem, 2권 2번)**
  - 허공(En suspens, 2권 5번)***
  - 무지개(Arc-en-ciel, 1권 5번)***
낸캐로우/미카쇼프 : 자동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7번

리게티 : 피아노 협주곡(1988)

* 요하네스 쇨호른 편곡
** 크리스 폴 하르만 편곡
*** 한스 아브라함센 편곡

피아노 : 김선욱
티토 체케리니, 앙상블 모데른

2023년 4월 6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통영시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을 음반으로 처음 들었을 때 악기의 기묘한 사용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이것은 현대음악에서 크게 놀랍지는 않은 접근법이지만, (경력 중/후반부의) 리게티의 경우 유독 다양한 악기소리를 캐리커쳐처럼 사용한다고 느꼈다. 피아노 협주곡은 호루라기, 오카리나, 플렉사톤(띠용띠용거리는 GTA 브금의 그거), 하모니카, 클래퍼(찰싹!) 등의 악기가 곡의 마감을 살리거나 중요한 순간 귀를 끌어당기는 멜로디를 노래하곤 한다. 곡을 끝내는 우드블락의 딱! 소리는 또 어떠한가. 이런 피날레는 리게티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 같다.

공연장에 향하니 리게티 - 낸캐로우 - 드뷔시의 원래 순서와 다르게 드뷔시를 첫 곡으로 옮긴다는 공지가 있었다. 그 나름의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크지 않은 편성의 앙상블 모데른이 다양한 색의 옷차림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쓸데없이 격식 차리지 않는 듯한 인상에서 기대가("유니폼 제발 벗어. 빌어먹을 초짜처럼 보인단 말이야(덴젤 워싱턴)") 생겨났다. 마찬가지로 편한 인상의 티토 체케리니가 곧이어 무대에 올라왔다.

곡의 다채로운 모습을 살린 한스 첸더 편곡의 드뷔시 전주곡을 듣고 있자니 내가 원래 들어왔던 곡에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괴짜 라빈 장군'의 익살스러운 모습은 곡의 개념상 악보에도 비슷한 지시가 있었을 것 같은데, 정작 이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악상을 살린 피아노 연주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복귀하면 악보를 살펴봐야겠다.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드뷔시의 음악세계를 충실하게 확장한 듯한 관현악 편곡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앙상블 모데른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유연한 인상까지는 아니었다.

리게티의 경우 인상이 사뭇 달랐다. 피아노 원곡을 관현악으로 옮긴 경우 보통 원곡에 없는 교향악적 울림이나 다양한 색채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아보인다. 하지만 이들 리게티 편곡의 경우에는 오케스트라로 피아노의 음색을 충실히 살린 느낌이었다. 그동안의 편곡들이 놓친 부분을 잘 보여준 것 같아 듣는 내내 즐거웠다.

1부의 리게티 연주가 끝난 후 인터미션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통영의 관객들은 이것이 잘못 나온 공지라는 걸 알고 자리에 남아있었다.

낸캐로우의 경우 훨씬 비르투오소 작품에 가깝게 들렸다. 원곡을 듣지 않았지만 자동 피아노 연주라면 어느 정도 무궁동적인 특징이 있지 않았으려나 싶다. 콘서트홀을 휘감는 연주에 환호가 이어졌다.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 마치 오케스트라의 한 악기처럼 독주 피아노가 지휘자의 왼편에 위치한 것이 눈에 띄었다. 곡을 들어보니 그렇게 안하면 안되겠다는게 바로 실감되었다. 어떻게 이걸 연주로 옮기나 싶을 정도의 복잡하고 맞물리는 톱니바퀴 같은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쉽게 눈을 마주치면서 호흡을 잇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일정이 밀려 공연 당일 밤에 시작한 이 후기를 이틀 뒤까지 계속 쓰고 있는데 아직도 1악장의 두드러지는 리듬을 포함한 몇몇 장면이 머리에서 맴돈다. 음악이 감정적 도취 없이도 이렇게 사람을 매혹할 수 있다는게 놀랍다. 특히나 익살스럽고 쿨한 인상의 이 곡이 말이다.

먼저 훌륭한 연주를 선보인 김선욱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일찌감치 진은숙 피아노 협주곡을 레퍼토리에 넣고 활약 중인 그가 리게티를 못할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훌륭한 연주가 펼쳐졌다.

김선욱은 착 가라앉은 음색으로 곡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사실 선명한 타건과 엄격한 리듬으로 작곡가를 만족시킨 에마르(DG, Teldec) 이후 이 곡에서 어떤 새로운 연주가 가능할지 궁금하긴 했다. 시중에 나온 연주를 다 들어보지 못한 입장에서 코멘트하기 조심스럽지만, 오늘 연주에서 김선욱이 선보인 독창적인 연주에는 존재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오케스트라와 긴밀한 앙상블적 대화를 이끌어나는 덕목이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면 2악장의 악기별 에피소드가 그렇게 익살스러우면서 동시에 진지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음악 실황에서 기술적인 지점에 감탄하는게(저런걸 어떻게 하지?) 이제는 너무 당연한 감상일지는 모르겠다만, 유별날 정도로 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기량을 극대화하는 김선욱의 연주는 오늘 연주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강약의 극단적인 대비를 위해 김선욱은 자세를 끊임없이 고쳐가며 곡에 표정을 더했다. 그렇게 자세를 바꿔가면서도 오케스트라와의 앙상블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런걸 어떻게 하지?

곡에 대한 이야기로 후기를 끝내고 싶다. 캐리커처적인 악기들이 자기 목소리를 과감하게 내는 이 곡의 기묘한 첫인상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훨씬 단단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은 대단히 개성적이다. 그게 이번 연주에서 내가 얻어간 교훈이다.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악상과 음항효과, 리듬이 절묘하게 융합되어있다. 이것은 성립이 어려울 것 같은 '총체적인 인상'을 만들어낸다. 물과 기름을 섞은 것 같은 융합의 방식은 나같은 일반 청자에게 계속해서 비밀로 남아있겠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이란 형태로 조금씩 실마리를 드러내기에 우리가 동시대성이 살아있는 이 걸작을 찾게 되는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