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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03: 토스카니니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1935년 6월 4일)

by Chaillyboy 2015. 1. 17.

토스카니니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각주:1] (1935 6 4)



 

오늘 밤 토스카니니는 BBC 심포니를 처음 지휘했고, 이는 단순한 연주를 넘어 음악과 천재를 고결하고 경이롭게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드물고 뛰어난 음악적 체험이었다. 지금부터 침착한 논조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토스카니니에서 우리는 역설을 본다. 여기 이 남자는 가장 강력하면서 개인적인 -그의 폭압적인 태도를 빼더라도- 지휘자이자, 어떤 명인들을 모아놓은 오케스트라에서도 거대한 지시를 이끌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스카니니는 단 한 순간도 과시욕을 드러내지 않는 지휘자이며 그가 제사장으로서 봉사하는 거장들의 작품 바깥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토스카니니의 브람스, 토스카니니의 바그너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토스카니니는 누구의 브람스와 바그너도 아닌 브람스와 바그너를 그저 전달할 뿐이다. 세계에서 제일 인정받는 이 지휘자는 절대로 음악과 청중 사이에 서있지 않고, 어떤 속임수도 사용하지 않고, 음악을 사적인 고백으로 이용하지도 않는다.


토스카니니는 가장 날카로운 음악 감각을 가졌다. 그는 작곡가의 생각을 곧바로 들여다보는데 음악에 대한 지식, 그리고 지식을 시대상황에 연관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토스카니니 예술의 정수는 리듬이다. 전혀 불필요한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 춤도 추지 않으며, 빠르고 풍부한 표정으로 음악을 이끌어나간다. 토스카니니는 주인이자 동시에 하인이다. 오케스트라의 주인이면서 동시에 음악의 천재성에 봉직하기 때문이다. 토스카니니는 완벽한 귀로 밸런스를 다듬는데, 당연하게도 그가 필요한 만큼의 많은 리허설을 요구한다. 토스카니니의 음악은 방대하고 둥글며, 또한 경로가 완벽할 정도로 명확하다. 리듬과 구조에 대한 명료함을 통해 그의 작업은 고전 우표를 연상시키게 된다. 나는 토스카니니에게 낭만의 어스름함을 찾아볼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의견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오늘 밤 토스카니니는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브람스를 들려줬다. 4번 교향곡은 웅변적이면서 동시에 직선적이었고, 균형이 잡힌 방향과 에너지는 아름다웠다 시종일관 인간적이고 다면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오늘의 브람스는 마초이면서 상냥함에 대한 애정을 가진 그런 남자였다. 2악장 안단테는 화려한 텍스추어를 나타냈고, 드러낼 듯 말 듯한 첼로의 테마는 진한 울림을 선보였다. 이 모든 게 정확한 템포 속에서 이뤄지고, 브람스가 관현악법에 능하지 못했다는 오류를 타파하는 듯 민감하게 꾸며졌다. 스케르초는 활기차고, 싹싹했고, 지나치지 않게 도취적이었다. 피날레 악장은 니키쉬의 해석을 떠오르는 듯 에너지를 창조하는, 그리고 폭발적인 순간이었다.




첨언: 짧은 글이다. 그러나 드디어 녹음이 남아있는 연주의 평론을 읽게 되었다. 카더스는 며칠 뒤에 공연들을 요약하는듯한 긴 평론을 한번 더 쓰는데, 이 글은 다음에 번역할 생각이다.


먼저 몇가지 짚어보자. 브람스 4번 교향곡을 연주했던 첫 BBC 공연은 6월 3일이다. 연주는 퀸스홀에서 이루어졌고 전체 프로그램은 케루비니의 아나크레온 서곡, 브람스 교향곡 4번,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마지막으로 바그너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다. BBC는 뛰어난 음질로 공연을 생생하게 잡아냈고, 이는 현재 웨스트힐아카이브 EMI(지금은 워너뮤직) 아이콘 시리즈로 쉽게 구할 수 있다.


EMI 음반에는 6월 3일 연주중 브람스와 엘가가 포함되어있다. 바그너는 6월 5일 공연의 같은 곡이 들어있어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케루비니 서곡은 EMI 박스엔 없고[각주:2] 웨스트힐 박스와 지금은 구하기 힘든 BBC 레전드 음반에 들어있다. 결국 공연 실황 전체를 구하고 싶으면 두 박스를 다 사던가 해야되는 것이다... 물론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고 빠진 이빨은 유튜브로 찾아서 들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평론의 날짜가 6월 4일로 남아있는 이유가 약간 궁금하기도 하다. 실제로 카더스는 '오늘밤'이란 단어라던가 현재완료 시제를 사용해서 공연을 묘사한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에 공연을 보고 온 자정 너머에 글을 썼나보다 싶었다.


사실 토스카니니의 브람스를 그렇게 좋아라 하는 입장은 아니다. 자신만의 단단한 심지를 선보이지만, 단호한 리듬과 울림이 간혹 부담된다고나 할까. 이런 신개념 접근은 이미 카라얀과 같은 후배 지휘자의 손에서 완전체로 선보였기도 하고... 선구자의 비애란 이런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순간은 또렷하기에 1악장 재현부의 일갈이라던가 2악장의 기막히게 아름다운 순간등 지금까지도 기억될 가치는 충분하다. 2악장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기가 막히게 뽑아낸다. '군악대장'등으로 폄하되는 배경에는 포스트-토스카니니를 표방한 일부 지휘자들이 그 앙상한 뼈대만 흉내내었기 때문은 아닐까. 


카더스의 글 역시 이런 생각들을 훌륭하게 담아냈다. 토스카니니의 브람스와 바그너 어쩌고 하는 부분은 동의할 수 없지만 이외의 부분은 감탄하며 읽었다. 그 내재율까지는 옮길 수 없었지만(운율이 절묘하게 녹아있는 카더스의 글은 읽는 맛이 일품이다) 명문을 허접하게나마 옮겼다는 즐거움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1. BBC Orcheatra [본문으로]
  2. 컴플리트를 어지간해선 안만드는 아이콘 박스의 짜증나는 행태인가 싶기도 한데, 당시 이루어진 스튜디오 세션에 실황을 보너스로 담은 모양새라서 그려려니 한다.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시 토스카니니는 HMV의 주도로 이 오케스트라와 여러 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