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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04: 코벤트 가든의 푸르트벵글러 – 트리스탄과 이졸데 (1935년 5월 22일)

by Chaillyboy 2015. 1. 19.

코벤트 가든의 푸르트벵글러 트리스탄과 이졸데 

(1935 5 22)

 




지난밤 코벤트 가든을 아름답게 빛낸 보기 드물었던 시적 순간을 논하기 전에 먼저 토마스 비첨 경에게 감사를 표한다. 모든 지휘자가 걸출한 동료에게 오페라 좌[각주:1]를 비우고 흔쾌히 기회를 주지 않으며, 그가 바로 얼마 전[각주:2] 같은 곡을 지휘했다면 더더욱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음악극에 대한 두 예술가의 걸출한 해석에 우위를 매길 필요는 없다. 한쪽에는 태양이 맞은편에는 달이 자신들의 찬란함을 드러낼 뿐.


비첨은 서정적인 광채와 흥분되는 리듬을 통해 비극을 적극적으로 관객 앞에 가져왔다. 반면 푸르트벵글러는 비극이 가진 비감을 온 마음으로 느꼈다. 그는 음표를 무겁게 가져가며, 시종일관 거리의 파토스[각주:3]를 음악 속에 집어넣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밤과 낭만의 세계가 된다. 푸르트벵글러는 텍스트와 운문을 통해 바그너에 다가갔는데, 이는 바그너가 작곡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반면 토마스 경은 악보 너머로 화려하게 연주하는 악기들과 매력적인 지휘를 읽어낸다. 푸르트벵글러의 오케스트라는 유창한 해설자로서 아름답고 기적적이기도 한 그런 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고대 희랍의 코러스처럼 말이다. 그는 성악을 압도하는 반주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무대장치와 오케스트라는 푸르트벵글러의 세심한 제어 아래 미묘하게 연결되었다. 묵중함과 원만함, 강렬함의 혼합이야 말로 그가 가진 천재성이다. 비극은 물리력의 세계를 벗어난 내면의 관념이자 정신적 경험이 된다. 강조되지 않는 듯한 맥동은 그의 예술의 특징이다. 나는 한번도 그런 2막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만들어낸 연인들의 재회장면 말이다. 청중은 성악가의 모든 음표와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오케스트라의 광포한 크레셴도는 영원한 모닥불로 향하는 향락의 길[각주:4]을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안내했다. 열정적으로 리듬을 집중하고 압박한 성취였다.



푸르트벵글러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모든 걸 보여줬다. 파국으로 내딛는 연인의 황홀함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푸르트벵글러는 마르케 왕에게 중후하고 위엄 있는 정의를 부여했다. 확실히 감동적인 처리였고 이는 자발적인 파토스와 비감을 제어하는듯한 귀족적인 템포가 설득을 가졌기 때문이다. 푸르트벵글러는 헌신적인 쿠르베날 바깥으로 인간적인 쿠르베날을 끌어냈다. 마르케 역의 키프니스[각주:5]가 어마어마했고, 얀센[각주:6]이 이전의 연기에 비해 더욱 깊은 울림을 그려낸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성악가들이 편하게 연기를 즐겼고, 코벤트 가든에서 연기했던 그들의 예전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렇게 가장 만족스러운 일치감이 얻어졌다. 비록 2막 몇몇 장면들에서 통일성이 깨졌고, 순간 내가 앨버트 기념비에서 멀지 않은 켄싱턴 가든즈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각주:7].


1929년 파리. 좌로부터 라이더, 푸르트벵글러, 멜히오르


만일 토마스 비첨 경과 푸르트벵글러 씨[각주:8]가 가진 관점의 차이를 짚어야 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토마스 경은 바그너 에 시큰둥하며 숨겨진 운율에 큰 관심이 없기에 음악극이 한 편의 시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대신 지휘자이자 노래하는 인간이기에 트리스탄의 악보 속 사냥터를 마주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에 푸르트벵글러는 트리스탄을 음악극 자체로 아껴, 감정적인 천성과 삶의 시상을 불러내는 무언가를 기어코 찾아낸다. 흔히들 바그너를 수사학자로 여기곤 한다. 나는 푸르트벵글러가 악절 사이에서 미적대며 짜임새를 솎아버리고, 기어코 연주를 박박 밀어버려 고자 같은 소리를 만들었다는 비난을 읽을 준비가 되어있다. 인정하건대, 풍부한 짜임새는 아니었다. 하지만 ‘Die im Busen mir die Glutenmacht’에서 ‘Meines Lebens Licht’[각주:9]까지의 절정은 앞으로 몇 년간 잊히지 않을 것이다. 라이더[각주:10]‘Lebens Licht’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위풍당당하고 맹목적이기까지 한 음성은 삶과 죽음, 왕과 형제 그 모든걸 비웃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대담하게 느린 템포로 몇몇 정적들과 함께 전주곡을 시작했을 때, 청중들은 트리스탄의 범상치 않은 로맨스와 파토스를 살펴볼락 말락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주의 필연적인 핵심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으며, 당연하게도, 한 번에 드러난다면 그건 절대 위대한 핵심이 아닐 것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쏟아지는 번뜩임에 숨막히지 않은 채 바그너의 핵심에 파고드는 사람이다. 우리가 편견으로 그저 스쳐 보냈을 많은 부분들에서 푸르트벵글러는 사랑스럽게 숨어있었을 진짜 음악을 끄집어 냈다. 그렇게 어젯밤 당당한 필연성과 함께 작품의 고결한 위상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푸르트벵글러는 처음 만난 오케스트라[각주:11]와 짧은 리허설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오케스트라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역시 트리스탄을 푸르트벵글러의 극에 서 있는 토머스 경과 연주했을 뿐, 다른 지휘자와의 연주 경험이 없었다. 때때로 주춤거렸지만, 아주 드문 순간이었다. 오케스트라는 기가 막히게 적응했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기억할 만한 밤을 마치며 단원들을 따뜻하게 축하했다. 오케스트라는 그를 대가로 여겼으며, 존경과 열정을 담아 갈채를 보냈다.




첨언: 유난히 옮기기 힘들었던 글이다. 장황한 글쟁이가 장황한 음악으로 글을 쓰니 이런 결과가 나오나 싶었다. 실제로 책에 실린 바그너 글은 모두 길이가 길다 --;;


카더스는 트리스탄에 관심이 없었나 보다. 기나긴 글에서 단 한번도 트리스탄에 대한 언급이 없다. 프랑스 푸르트벵글러 협회의 자료에 의하면 35년 런던 공연의 트리스탄은 멜히오르였다.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라는데 그렇게 20세기 불세출의 헬덴테너는 묻혔다. 1935년의 멜히오르는 웨스트 힐 아카이브에서 발매된 보단즈키 지휘의 메트로폴리탄 실황으로 전곡이 남아있어 당시의 기량을 그대로 들어볼 수 있다[각주:12].


라이더는 안타까운 케이스인데 그녀가 노래한 오페라 전곡 녹음은 남아있지 않다.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서 라이더의 대단했던 음성을 간접적으로 접해야 한다. 프리다 라이더 협회에서 그녀의 녹음을 집대성해서 판매중이지만 아직 이를 구매하지는 않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33년 보단즈키 지휘의 메트 실황 일부가 남아있다. 녹음 탓인지 그닥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라이더의 음성에 문자 그대로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개인적으로 라이더가 플라그스타보다 한수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어느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는 미성은 카더스의 표현처럼 치명적이었다.


기사의 주인공은 푸르트벵글러다. 1935년의 푸르트벵글러는 기량과 커리어의 절정에 있었고, 그의 트리스탄은 탁월했을게 분명해 보인다. 물론 남아있는 녹음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런던 필하모닉과 궁합이 잘 맞았을지도 미지수이고... 실제로 1937년의 푸와 런던필은 합이 그닥 안맞았기에. 저 시절 푸의 트리스탄은 41/43년 빈 실황 발췌와 30년대 간혹 남아있는 관현악 녹음을 통해 추측해야 한다. 적어도 52년의 스튜디오 녹음으로 푸의 트리스탄을 단정짓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게 요지이다. 47년 베를린 실황도 반 이상 온전하게 남아있는 상황인데... 대부분이 그렇지만 푸르트벵글러야 말로 편협한 자료들에 의해 몰이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술가가 아닐까.


카더스는 푸와 비첨을 계속해서 비교한다. 서론에서 둘의 비교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냥 떡밥용 수사라 보는게 맞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촌철살인과 떡밥의 나라 영국이다. 비첨의 트리스탄은 운좋게 전곡이 남아있고 이는 런던 필하모닉을 지휘한 37년의 녹음이다. 덕분에 우리는 녹음을 통해 푸와 비첨을 직접 비교할 수 있다. 헤르베르트 하프너[각주:13]가 지적했듯 두 지휘자는 분명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러나 카더스의 관점은 상당히 그럴듯 하. 푸르트벵글러는 극의 영역에서 성악이란 큰 뿌리를 바탕으로 하나의 유장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출렁이는 흐름 속 음악은 때론 희미해지며 성악 뒤편에서 형체를 보일랑 말랑 한다. 계산된 루바토와 셈여림은 성악과 맞물리며 밤의 세계를 지독할 정도로 농밀하게 그려낸다. X클래식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오페라를 혹평한 평도 다 비슷한 이야기들 아닌가. 자욱한 안개부터 떡칠, 걸레까지. 카더스가 인용한 '고자같은 소리' 역시 비슷한 맥락이리라 본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호불호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해석의 옳고 그름에 대해 함부로 선을 긋진 말아야 하겠다. '고자'해석이던 토스카니니류의 해석이던 바탕에 깔린 어마어마한 음악/문화적 배경과 그 외 다양한 요소들을 무시하고 드러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건 옳지 않다 생각한다. 음악 앞에선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비첨의 바그너에 대해선 카더스가 남긴 다른 기사들이 있기에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 토마스 비첨 경은 1934년부터 2년동안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다. [본문으로]
  2. 4월 30일 비첨의 지휘 이후, 5월 20일에 같은 가수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했다. [본문으로]
  3. Pathos of distance(Ge: Pathos der Distanz): ‘도덕의 계보’속 니체의 개념. 니체는 도덕은 절대 선천적이지 않으며, 그 기원이 지배층과 하위계층 사이의 거리감에서 나온 옮고 그름의 문제라고 말했다. [본문으로]
  4. The primrose path to the everlasting bonfire: 셰익스피어 맥베스에 나오는 경구. 번역본이 없어 제대로 번역을 못한… [본문으로]
  5. 알렉산더 키프니스 (Alexander Kipnis, 1891 - 1978): 러시아 태생의 명 베이스 [본문으로]
  6. 헤르베르트 얀센 (Herbert Janssen, 1892 - 1965): 독일의 명 바리톤 [본문으로]
  7.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을 기리는 앨버트 공 기념비(역시 연인이라서?)와 캔싱턴 가든즈의 이름으로 친 개드립 [본문으로]
  8. Herr Furtwängler [본문으로]
  9. 2막 1장의 이졸데의 대사 “신은 내 가슴 속 불을 부채질 하고 …(중략)… 불을 끌 것이다” [본문으로]
  10. 프리다 라이더 (Frida Leider, 1888 – 1975): 독일 출신의 전설적인 드라마틱 소프라노. [본문으로]
  11.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본문으로]
  12. 멜히오르 디스코그래피 사이트에는 카더스가 관람한 런던 푸르트벵글러의 실황 3막이 녹음되었다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는 없는 기록이고 출처가 모호하기에 녹음이 안 된걸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본문으로]
  13. 유명한 푸르트벵글러 평전의 저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