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의 헨리 우드 경 – 베르디 레퀴엠 (1933년 11월 24일)
헨리 우드 경 (1869 - 1944)
저게 바톤인지 레이피어인지...
헨리 우드 경은 할레를 지휘한 적이 없다. 지난밤 파릇파릇한 월계관을 걸고 찾아온 우드 경에게 어려운 과제가 기다렸다. 베르디 레퀴엠은 영국 종교음악이 오랫동안 만들어왔던 방향과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말할 것도 없이 레퀴엠에는 성악 대위법 기교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하게 도사리는데, 오라토리오 전통이 – 솔직히 너무 – 길게 이어진 영국 성악과 비교하면 더더욱 눈에 띄는 점이다. 베르디 레퀴엠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는다. 중세인이 가졌을 무덤 속 환멸과 죽음의 공포가 칼날을 번뜩일 것이다. ‘진노의 날 Dies Irae’은 단테의 지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려낸다라… 단테가 아닌 도레 1의 지옥도(地獄圖)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베르디가 소름 끼치게 빚어낸 리얼리즘의 광채 아래선 영국 예배음악이 익숙한 그 누구도 휘청대며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 리얼리즘은 난자당한 채 살아 움직이는 송장들을 엘 그레코 2처럼 불러내는데, 물론 공포를 그리는 베르디의 상상력이 이들처럼 앙상했을까 싶지만 말이다. 베르디는 탄탄한 이탈리아인의 정력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무덤과 마주할 수 있었다.
ps. 계단에 디오게네스처럼 주저앉은 사람, 본 윌리엄스 본인 맞다.
장례 미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베르디식 감정 호소는 영국 음악 속 빈약한 울림을 무색하게 한다. 이 모든 걸 떨쳐내야 했기에 헨리 우드 경은 힘들게 과제를 이끌었다. 청중들이 이런 속사정을 안다면 헨리 경이 꾸려낸 리더십에서 ‘히타이트인 우리야’ 3를 보고 더 뜨겁게 환호하지 않았을까. 명망에 기대어, 헨리 경은 걸작에 어울리는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다. 물론 리허설에서 뿌린 씨를 훌륭하게 거두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레 합창단이 밤낮없이 리허설을 소화하려고 노력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헨리 경은 산도 춤추게 할 근성의 일꾼이기에 평범한 합창단쯤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할레 합창단이 지난밤보다 생생하게 노래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억양이 훌륭하게 다듬어졌고, 이런 힘은 끄트머리에서 확연해졌다. 물론 한두 가지 결점은 피할 수 없다. 합창단이 오케스트라와 각각 리허설 한 상황은 영국이 가진 묘한 전통이다. 요컨대 할레 합창단은 오케스트라와 공연 전까지 합을 맞춰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극적인 작품에서 없어선 안 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사이의 재빠른 발맞춤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베르디 레퀴엠은 그저 들을 뿐만 아니라 상상의 세계를 드넓게 펼쳐야 하는 작품이다. ‘진노의 날’의 서주부는 장관이었다. 돌진하는 현악과 베르디의 전매특허 피콜로, 쩔뚝대는 드럼의 두드림. 온 몸이 떨리는 가사 “Quantus tremor est futurus”까지. 그저 무난하게 부르는 레퀴엠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연극 같은 레퀴엠이 돼야 한다. 브리튼 섬의 합창 작곡가들이 하느님 아래 평온함에 기댈 뿐인 오라토리오를 떨치길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엘가 ‘제론티어스 4’를 활짝 여는 번민조차 그들에겐 공포스럽게 들리는 수준이니 말이다.
‘거룩하시도다 Sanctus’는 이를테면 바흐 신봉자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인데, 고루하게 형식을 들이미는 이들도 ‘하느님의 어린 양 Agnus Dei’에서 보여주는 섬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용서하소서 Libera me’가 시작되면 청중은 다시금 천둥과 번개 속으로 빠져든다. 베르디는 베이스 주자의 혼을 빼놓는 ‘진노의 날’로 돌아와 여전히 살 떨리게 으르렁대는 트롬본과 함께 모두를 종말 속으로 패대기친다. 그러나 푸가야말로 지난밤을 빛낸 예상 못 한 주인공이다. 헨리 경은 악보의 뒷면까지 꿰뚫어보는 솜씨로 푸가를 다듬어냈다. 음악은 시종일관 강렬했고, 명확하게, 절묘하게 필요한 에너지를 챙겨냈다. 푸가는 베르디가 극적 상상력을 벼리는데 얼마나 큰 재능이 있는지 보여준다. ‘팔스타프’ 역시 베르디가 푸가에 어떻게 코미디의 육즙을 풍성하게 담아냈나를 들려주는 좋은 예시 아닌가. 미사곡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작곡가의 성격과 스타일에서 나왔을 순박한 어조가 담겨있다. 연역을 위한 형이상학적 복잡함은 여기에 없다. 베르디는 관념론자가 아니다. 그의 미사곡은 감정에 충실할 뿐인데, 그에게 감정은 작품의 재료였고, 또한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이기에.
첨언: 잘 모르는 지휘자라 크게 할 말은 없다. BBC 프롬스를 만든 장본인이었고 당대의 뛰어난 오페라 지휘자라는거. 그냥 그저 그런 영국 지휘자 1로 넘어가기에는 또 생각보다 녹음이 남아있는데, 결과적으로 먼젓번의 하티보다도 듣보가 됐다는 느낌. 뼈가 탄탄한 오페라 지휘자 답게 팔뚝만한 바톤으로 아주 실용적인 지휘를 한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 시대 지휘자들이 대체로 이랬지만.
주목할 점은 네빌 카더스의 글이다. 앞으로 많이 볼 이 사람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유의 신랄함과 산문적인 주절거림은 그렇다 치더라도 곡이 어떻던 간에 일단 자기 논지를 잡으면 그걸로 이야기를 쭉 밀고 나간다. 알아챌 분도 계셨겠지만, 베르디 레퀴엠을 보고 온 글에 솔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다. 누가 봐도 공연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요새 공연 기사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 자체로 한편의 에세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게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딴 세계의 지휘자만 나와 지루한 감이 없질 않다. 걱정하지 마시라. 다음은 토스카니니다.
- 귀스타브 도레 (Paul Gustave Doré, 1832 – 1883): 프랑스의 인기 판화작가. 단테 신곡의 삽화작가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 엘 그레코 (El Greco ,1541 - 1614): 스페인의 화가 [본문으로]
-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다윗 왕의 군인. 우리아의 부인 밧세바가 다윗왕의 아이를 가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다윗 왕은 전장의 우리아를 불러 집에서 쉬라고 명한다. 강직한 우리아가 전선의 군인들을 생각하며 집에서 부인과 함께 쉴 수 없다며 왕궁에서 수비대와 잠을 청하고, 다윗 왕은 그를 다시 전쟁터로 보내 죽게 사주한다. [본문으로]
- 엘가의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 [본문으로]
'음악잡설 > 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더스 평론 05: 필하모니아와 함께한 카라얀 (1952년 5월 12일) (2) | 2015.01.22 |
---|---|
카더스 평론 04: 코벤트 가든의 푸르트벵글러 – 트리스탄과 이졸데 (1935년 5월 22일) (2) | 2015.01.19 |
카더스 평론 03: 토스카니니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1935년 6월 4일) (0) | 2015.01.17 |
카더스 평론 01: 할레 콘서트 (1927년 10월 28일) (6) | 2015.01.13 |
네빌 카더스 경 (1888 - 1975) (0) | 2015.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