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평론가 네빌 카더스 경은 대부분의 평론가가 그랬듯이 사후 깔끔하게 잊혔다. 그래도 당대의 쌓은 명성빨이 있는지 많은 그의 기록들이 정리되서 출판된 흔적이 남아있기에 (흔적이 남아있을 뿐, 꾸준히 출판되는 상황은 아니다), 오래된 음악의 냄새를 찾아 헤메는 덕후의 입장에서 그의 정리된 글들은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기껏해야 노먼 레브레히트가 '공신력있는' 평론가로 인용되는 한국의 클래식 시장에서, 이런 사람들은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는게 개인적인 생각.
간단하게 그의 삶에 대해 소개할까 싶다. 빅토리아 시대의 끝물에 태어난 네빌 카더스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영향력있던 평론가로 활동했다. 특이하게 당대에는 음악평론만큼이나 크리켓 평론으로 유명세를 떨쳤는데, 사실 본업이 크리켓 평론이었던 것 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좀 생경한 광경인데, 이를테면 진은숙을 열렬하게 옹호하는 객석 필진 박펠레라던가, 돔구장드립을 줄기차게 외치는 야구 해설자 안동림을 상상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선 직업의 완벽한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납득 가능한 풍경이었고, 당시는 현대적인 음악 산업의 태동기였기에 이런 상황이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는 이야기만 덧붙여야겠다. 월터 레그나 존 컬쇼 같은 입지전적 업계종사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네빌 경도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은 없기에. 중요한 건 음악 학위가 아닌 음악을 얼마나 제대로 듣는가의 문제아닐까. (어째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클래식 덕후들의 롤 모델이라 할수도?)
네빌 경은 특유의 낭만적인 문체와 정확한 귀로 당대를 휘어잡았다. 네빌 경의 문체는 '맨체스터 가디언' 지의 선임 평론가 새무얼 랭포드와 어니스트 뉴먼의 객관적이고 분석적이었던 문체와 전혀 달랐다. 직관적인 평론 때문에 음악가들과 분란이 생기기도 했다는데, 글을 읽어보면 당사자로서는 좀 억울하다 싶겠다는 부분도 종종 보인다(여기는 촌철살인의 고향 영국이다). 물론 성격이 원만해, 많은 음악가들과 깊은 친분을 유지했고, 바로 이런 점이 세심한 평론을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친분과 글발을 이용하여 당시로서 생소했던 말러나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점. 그런 탓에 지금도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말러 관련 글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1
음악 평론은 호주 피란시기를 제한다면, 1927년 '맨체스터 가디언'에서 시작한 평론부터 1975년 그가 사망하는 해까지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영국에 이런 저런 결점이 많아도 아무튼 당대 클래식의 요충지였기에 그의 기사는 지금까지 회자되거나 음반화된 많은 공연까지 포함한다. 모든 평론이 묶여서 출간된 적은 없는 것 같고(사실 큰 의미도 없지 않을까), 평론 선집이 불규칙하게 출간되었을 뿐. 이외에도 자서전이나 크리켓 관련 저작들이 지금까지 판매중이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평론 선집을 운 좋게 구할 수 있어서이다. 낡은 책 속엔 다니엘 바렌보임의 추천사와 선택된 백여편의 평론이 들어있다. 선택이 한 쪽으로 치우쳐진 느낌이 들기는 해도(관현악에 대한 평론이 주를 이룬다), 담겨진 내용은 상당히 가치롭다. 36년 토스카니니의 명가수 공연이라던가, 푸르트벵글러의 30년대 코벤트 가든 바그너 공연들, 카라얀의 영웅의 생애, 그리고 켐페의 반지. 누군가 네빌 경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이 기록들의 가치(이젠 역사적 가치라고 부르는)는 인정해야 한다.
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수록된 평론들을 번역해서 올려볼까 한다. 번역자가 수준 이하의 조악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종이 속에 잠들어 있는 것 보다는 엉터리로나마 넷 속에서 숨쉬는게 이 명문에 합당한 처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생생했던 그때 그 공기를 느끼며 오늘의 클래식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기에.
- 지금은 '가디언'으로 발매중인 유명한 그 잡지 맞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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