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기사 – 풍성한 삶과 사랑의 감각 (1934년 1월 25일)
1933년 스튜디오. 로베르트 헤거와 장미의 기사 3인방.
HMV가 고민 끝에 ‘장미의 기사’의 으뜸가는 장면들을 골라 유성기(留聲機)로 옮겼다 1. 녹음이 빈에서 이뤄졌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슈트라우스의 향취를 품은 ‘그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 연주했음은 물론이다. 가수 또한 완벽했다. 모두가 기다렸을 로테 레만의 원수부인은 영원미를 머금은 채 극 속 아이러니를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창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음성과 더불어 엘리자베트 슈만의 조피는 레코드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사랑 앞에 용감한 옥타비안을 노래한 올셰프스카 2 역시 빛나는 목소리를 뽐냈다. 허나 불한당 옥스를 그려낸 마이어 3의 육감적인 연기야말로 유머를 머금은 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레코드의 일등공신이다. 안타깝게도 옥스의 많은 부분이 잘렸다. 옥스의 많은 음악이 무대 속에서 연기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극의 음악은 남자의 동작 하나하나와 백년가약이라도 맺은 듯 4 기막히게 연결되지 않는가. 사실 몇 군데의 삭제는 아쉬웠다. 옥스가 원수부인을 떠난 뒤 부인과 옥타비안 사이로 흐르는 1막의 음악은 모든 부분이 탁월하기에 단 한 줄로 빠트리기 아쉬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에서 볼멘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장미의 기사’의 크림이 담겨있는 천국 말이다. 물론 그저 그런 휘핑크림 5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 시대 영국에서 ‘장미의 기사’가 그저 왈츠 선율에 묻어가는 판타지아일 뿐이라는 무식한 이야기가 돌기 때문이리라. 통속적인 코미디는 화려한 겉면 아래서 숨 쉴 삶의 깊은 지혜를 빈틈없이 엮어낸다.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에서 태어난 원수부인은 어떤 희극의 인물보다도 아름답다. 그녀는 자체로 완벽하고 모두가 우러러본다. 호화로운 세계 속의 여인은 마음속 달콤씁쓸함을 예민하게 느낀다. 애달픔과 환멸이 우아함을 덮칠 때마다 아이러니한 비감 속 뮤즈가 된 양 살며시 입술을 깨무는 것이다. 옥스에게 위엄을 명하는 원수부인은 얼마나 절묘하고 우아하게 자태를 드러내는가. 우리말로 옮기기 힘든 부인의 대사이다. (“Mach’ Er bonne mine a mauvais jeu: so bleibt Er quasi doch noch eine Stand-person 6”)
슈트라우스와 레만
다행히 슈트라우스는 음악으로 모든 걸 그려낸다. 너무나 상냥하게 어느 순간 경감을 바라보며 부군의 근위병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저 여인의 천성을 보라. 그리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라. 원수부인이 여관방으로 납신 뒤 모든 걸 알고 애달파 하는 3막에서 음악은 그녀가 입었을 풍성한 파니에 7처럼 찬란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 품위는 옥스조차 움직여 그를 부드럽고 인간적인 음악 속으로 흘려보낸다. ‘장미의 기사‘를 쓰며 제대로 영감을 받았던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슈탈의 빼어난 대본을 한 군데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인물들의 마음, 이를 둘러싼 우아한 오페라 세계를 적어낸 대본 말이다.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은 모든 순간을 거울처럼 비춰낸다. 진짜배기 극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여주는 마법 안경이 랄까. 흑인 8 꼬마가 아침 상을 대령한 뒤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에서 이에 질세라 길게 드리워진 화음으로 고개 숙이는 오케스트라를 보라. 18세기의 격식과 품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원수부인이 자포자기한 옥타비안을 비웃자 오케스트라 역시 모두를 휘어잡는 농담조로 옥타비안을 비웃는다. 옥스가 귀한 혈통을 단언하며 수도원을 지었던 독실한 레르케나우 가문의 선조를 들먹이자 음악은 근엄하고 번지르르하게 흐르지 않는가. 여관방에 촛불이 켜지자 목관은 천장을 향해 요리조리 흩어지고 깜빡인다. 은장미가 주인공처럼 나타나고, 문이 열렸다 닫히고, 원수부인이 책상에서 유리병을 쳐다보는 그 외 많은 장면에서 오케스트라는 진짜처럼 묘사해낸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살며시 드러내는 음악이 쓰인 적이 있을까.
안톤 파이스토이어, 옥스를 연기하는 리하르트 마이어, 1927년, 잘츠부르크현대미술관
물론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슈탈이 ‘장미의 기사‘에 불어넣은 큰 그림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원수부인과 조피, 옥타비안, 옥스를 안다는 건 그들 속의 풍성한 삶의 감각 그리고 사랑의 감각을 가진다는 것이기에.
로베르트 헤거가 레코드 속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오케스트라가 멀리서 겉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우리 시대 오페라 녹음은 여전히 가수만 들어대는 소비자를 상정하곤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말 듣기 힘든 가수들이 여기 모였다. 앞으로 다시 없을 ‘장미의 기사‘의 캐스팅이 여기 모인 것이다.
첨언: 함부르크 오퍼에서 주목을 받아 빈에서 꽃을 핀 로테 레만의 커리어는 분명 20년대가 전성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33년 녹음은 레만의 전성기 기록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레만이 원수부인 역을 본격적으로 노래한 때가 커리어의 중후반기라는걸 생각해 본다면 33년의 원수부인 녹음도 레만의 원수부인을 충분히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레만하면 원수부인을 떠올리곤 하게 되니까. (초기의 레만은 조피를 노래하곤 했다. 실제 레만의 전성기 레퍼토리는 피델리오와 지글린데에 더 치우쳐 있다.)
마이어는 어떠한가. 당대의 많은 이들이 마이어의 옥스에 대해 칭송한 바 있으며 (카라얀은 마이어가 옥스의 가장 뛰어난 본보기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가창은 카라얀이 그리는 옥스 남작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하다. 궁색하고 익살스럽지만, 근본적으로 교양있는 궁정인의 모습. 빈 초연에 참여했던 마이어의 스타일은 빈-옥스의 계보로 쭉 이어진다 생각한다. 다만 전성기가 한참 지난 녹음이기에 아쉬운 점도 없질 않아 있기는 하다.(마이어는 녹음후 몇년 뒤 세상을 뜬다)
한편, 녹음은 원래 슈트라우스 본인의 지휘로 전곡반이 계획되었다고 한다. 허나 슈트라우스의 개런티가 아주 높았고, 다른 적임자였던 브루노 발터 역시 슈트라우스만큼의 개런티를 요구했기에, 결국 발터의 제자인 로베르트 헤거에게 바톤이 넘어온 것 9. 아 돈 적게 받고 지휘좀 해주지.. 하는 생각이. 참고로 전곡반 계획에서 이탈리안 쟁어역은 베니아미노 질리를 염두해뒀다 하는데, 이 역시 질리의 높은 개런티로 성사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HMV matrix 2WX 581 – 606, Catalog numbers DB 2060 – 72 [본문으로]
- 마리아 올셰프스카 (Maria Olszewska, 1892 - 1969): 20년대를 풍미한 독일의 콘트랄토 [본문으로]
- 리하르트 마이어 (Richard Mayr, 1877 - 1935): 오스트리아의 베이스바리톤. 당대 가장 뛰어난 모차르트, 슈트라우스 가수로 활동했으며 특히 옥스 남작으로 명성을 떨쳤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의 바락 역은 마이어를 염두해 두고 만들어졌다. [본문으로]
- 극중 결혼하기위해 발버퉁치는 옥스에 대한 언어유희로 보인다. [본문으로]
- 슈트라우스의 2막 발레곡 ‘휘핑크림(Schlagober)’ op.70 으로 친 드립. 1922년 빈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본문으로]
- 3막 후반부 옥스남작에게 위엄을 지닌 채 떠나라며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니 불평하지 말아요: 적어도 지체 높은 사람으로 체면치레는 세울테니”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카더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한국어로 그저 옮긴다고 그 향기까지 따라올 것 같지는 않다. [본문으로]
- 파니에 (Pannier) : 치마를 부풀리게 위해 입던 여성용 언더웨어의 일종 [본문으로]
- Nigger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카더스가 글을 썼던 30년대에만 해도 인종차별의 의미가 크게 담기지 않은 단어였다. [본문으로]
- 브루노 발터가 장미의 기사를 잘 지휘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이는 다분히 상업적인 전략이다. 발터는 20년대 코벤트 가든에서 대다수의 독일 오페라를 지휘했기 때문이다.(독특한 시스템인데, 독일상임같은 느낌) 런던에선 발터의 바톤 아래 레만-올셰프스카-슈만-마이어가 노래해왔고, 이 조합이 그대로 발매됬다면 큰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결국 HMV는 36년에 발퀴레를 발터-멜히오르-레만 조합으로 녹음하며 그 염원을 풀었다 해야되나. [본문으로]
'음악잡설 > 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더스 평론 11: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0) | 2015.02.21 |
---|---|
카더스 평론 10: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951년 10월 23일) (4) | 2015.02.17 |
카더스 평론 08: 고결한 낭만의 화신 (1947년 3월 26일) (2) | 2015.02.06 |
카더스 평론 07: 런던의 새 오케스트라 – 그들의 첫 공연 (1932년 10월 8일) (4) | 2015.02.01 |
카더스 평론 06: 제 4번, 변화의 바람 – 에든버러 축제의 브루노 발터 (1951년 8월 28일) (0) | 201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