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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08: 고결한 낭만의 화신 (1947년 3월 26일)

by Chaillyboy 2015. 2. 6.

고결한 낭만의 화신 (1947 3 26)



1937년의 클렘페러(좌)와 미국 망명자들. 쇤베르크의 모습도 보인다.


 

지난밤 클렘페러 박사가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육중했던 대 푸가[각주:1]가 먼저 홀에 울려 퍼졌다.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대 푸가는 콰르텟이 모든걸 쏟아 만들어내는 강렬한 원곡의 무게감에 견줄 만 했다. 클렘페러는 원곡을 훌륭하게 뒤바꿨다. 모든 악기가 놀랍도록 깔끔하게 들렸는데 다이나믹이 세심하게 조절되었기에 가능한 경지다. 거인[각주:2]에서부터 매섭게 휘몰아친 의지 앞에서 음악은 자신의 지평선 너머까지 품어내려는 듯이 보였다. 베토벤은 조성과 짜임새, 리듬으로 씨름하며 거대한 대 푸가 악장을 다듬었다고 여겨졌는데, 반면 클렘페러는 이런 통념들을 경솔한 신성모독이라 느껴 단칼에 내쳤기 때문이다.



클렘페러는 포디엄에 뼈를 묻게 될 단 한 명의 지휘자다. 클렘페러에서 음악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독실하게 흐른다. 이런 경지는 기예와 미학, 신중함, 심지어 예술마저도 단단한 도덕으로 둘러 쌓아야 성취할 수 있다. 어제 들은 베토벤 7번 교향곡에선 환희와 활기차게 약동하는 생명력마저 홀대 받으며 힘겹게 겨우 모습을 드러나곤 했다.


사람들은 7번 교향곡을 베토벤의 쉬어가는 구간 정도로 생각하길 좋아한다[각주:3]. 떠들썩한 5번 교향곡을 지나 비교적 잠잠하게 6번과 7, 8번 교향곡이 울리는 건 이어 다가올 9번의 태산 같은 도전과 씨름을 위해 한 숨 돌리라는 배려 같다. 영웅처럼 다가와 망치로 모루를 두들겨대는 그 작품[각주:4]속 베토벤을 마주하자니, 광활한 심성과 자연이 잠시나마 쉬고 있을 교향곡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것이다. 허나 클렘페러가 지휘한 7번 교향곡에선 긴장을 풀어낼 여지가 전혀 안 보인다. 망치와 모루가 다시금 먼지를 털어낼 뿐이다. 이쯤 되면 모루가 가차없이 갈겨대는 망치를 어떻게 버텨낼지 궁금해진다.



물론 해석자가 어떻게 의도했는지 무색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7번 교향곡에서 쏟아졌다. ‘무도의 화신이라는 옛 말이 그저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클렘페러가 넘쳐 흐르는 풍악과 에너지[각주:5]에 무작정 선을 긋지는 않았나 보다. 리듬 속 음표들은 단호하고 거칠게 울려댔기에 듣는 이는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물론 의심할 바 없이 훌륭한 연주였으며 훌륭한 생각, 훌륭한 실천이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청교도적이지 않았는가. 2악장 알레그레토는 올림포스를 뿌옇게 둘러싼 위엄 속에서 아름다움을 잃고 엄숙한 모습만 드러냈다. 산뜻한 장음계는 그 열렬한 감각으로도 청중들을 격양시킬 수 없었다. 악장은 불길하리만치 장엄하게 흘렀다. 허나 도널드 토비[각주:6]가 집어냈듯이, 베토벤이 느린 악장을 알레그레토라고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클렘페러의 숙련된 경지는 살아있는 어떤 지휘자도 보여줄 수 없는 수준이다. 잔뜩 긴장한 채 전방을 주시하려는 의지로만 드러났을 경지였지만 말이다. 클렘페러가 받든 소명에는 어딘가 구닥다리 같은 면도 있다. 클렘페러가 꺼지지 않을 용광로 같은 자신의 음악적 직감마저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그런 인간 클렘페러를 보여줬다. 대 푸가가 끝난 뒤 잽싸게 쏟아졌던 박수세례 속에서 클렘페러는 한번의 손짓으로 필하모니아를 일으켜 세웠다. 포디엄으로 그를 부르는 환호 속에서도 1 바이올린 뒷편에 그저 서있을 뿐이었다. 어제 본 거인은 고결한 낭만의 화신임에 분명하다. 우리 시대가 목 말라 하는 그런 낭만 말이다.



첨언: 1933년 나치의 집권으로 클렘페러는 순식간에 포디엄을 잃는다. 1932년 독일 정신에 기여한 공로로 공화국으로부터 괴테 메달을 수여받은 인물에게는 가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떠돌다 클렘페러는 LA필에 자리잡고 1945년까지 LA와 뉴욕을 오가며 지휘한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정착했던 그의 선배들과 달리 클렘페러는 환영받지 못한다. 조울증이 도지면서 기피대상으로 낙인찍히고 정신병원까지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전후 유럽으로 돌아간 클렘페러는 51년 월터 레그를 만나면서 제 2의 삶을 시작한다.


애매한 점들을 정리해 보자. 클렘페러가 유럽으로 돌아간게 1947년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부다페스트 오페라 상임직을 수락한 1947년과 혼동됬을 가능성이 크다. 클렘페러는 1946년에 이미 파리에서 Vox 레이블을 위한 일련의 바흐 녹음을 진행한 바 있고, 1945년 12월에 LA필을 지휘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1946년에 유럽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클렘페러는 1951년에 최초로 필하모니아를 지휘했다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로열 페스티벌 홀이나 클렘페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가 부재하기에 속단하기 이르지만 차근차근 살펴보자.


아르히폰의 경우 1951년 6월 25일에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를 처음 지휘했다고 언급한다. 6월 공연은 월터 레그의 회고록에 잘 묘사 되어있다. 슈나벨과 조지 셀이 두 차례의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셀이 사정상 지휘를 못하게 되며 두 사람은 레그에게 클렘페러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클렘페러가 엘가의 곡을 지휘하길 거부하는 한바탕 소동이 있고나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고 레그는 회고한다. 실제로 필하모니아가 레그의 개인 오케스트라였다는걸 생각한다면 둘이 처음 만나는 시점에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를 처음 지휘했지 않았을까. 


그러나 카더스의 기사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결론짓기는 이르다. 책의 편집 품질로 봤을 때 편집 오류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레그의 회고록을 계속 쳐다보자. 레그는 클렘페러가 1940년대 후반에 런던에 처음 나타났다고 이야기 하며 작곡가 리처드 오스틴이 부활시킨 'The New Era Concert Society'의 일환으로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가 공연했다고 회고한다. 


윌리엄 월턴과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바흐의 모음곡과 스트라빈스키의 교향곡, 베토벤의 에로이카로 짜인 프로그램이었다. 그닥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내 오케스트라는 클렘페러의 비팅을 이해하지 못한듯 보였고, 스트라빈스키는 생소한 작곡가였다. 월턴과 나는 휴식시간에 자리를 떴다.


즉 1940년대 후반에 클렘페러는 런던에 데뷔한 것으로 보이며, 날짜는 1946~1947년 사이로 보인다. 47년의 본 공연이 클렘페러의 첫 공연이었다면 나불대길 좋아하는 카더스가 그 사실을 어떻게든 기사에 담지 않았을까.




  1. '베토벤 내림나장조 현악 사중주의 피날레로 계획되었던' 가독성을 위해 본문을 주석으로 옮겼다. [본문으로]
  2. 클렘페러를 지칭. 클렘페러는 장대한 체구로 유명했다. [본문으로]
  3. 궁금한 점 하나. 저 시대 사람들은 정말로 베토벤 6 7 8번 교향곡을 별 볼일 없는 곡으로 생각했을까. 아님 단지 카더스의 주절댐인가. [본문으로]
  4. 9번 교향곡 [본문으로]
  5. 본문은 seven-league boots란 단어를 사용했으나 적당하게 의역했다. Seven-league boots는 유럽의 민속 설화로 주인을 가려 받는 마법장화를 신게 되면 한 걸음에 백 리를 걷게 된다는 이야기다. [본문으로]
  6. 도널드 토비 경 (Sir Donald F. Tovey: 1875 – 1940) : 영국의 저명한 음악학자 겸 평론가 겸 작곡가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