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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11: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by Chaillyboy 2015. 2. 21.

제론티우스의 꿈 (1939 2 10)



1945년 4월 스튜디오 녹음

 


그저 삐까번쩍한 솔리스트나 보려고 할레 공연을 찾던 그들이 오지 않았기에 어젯밤 청중은 고요함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기억에 남을 연주로 엘가의 걸작을 들을 수 있었다. 깊은 장면을 일궈낸 모든 예술가들이 그 경험을 자랑스러워 하리라. 말콤 사전트 박사는 그 어떤 때보다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 냈다. 물론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고, 때때로 광활함이 부족해 보였다. 육신 너머의 황홀함, 작은 합창단이 부른 천사들[각주:1]의 탄식으로부터 나와야 할 광활함 말이다. 또한 바이올린은 “O gen’rous love”[각주:2]가 울리는 법열의 순간, 순수한 high E 음을 선보이는데 실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를 잡아 끄는 웅변적인 노래를 보여준 합창단은 시종일관 음악적이었다 평가하고 싶다. 모든 성부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특히 독창의 경우 콘서트 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악보를 그대로 옮겨놓은 소리. 사전트 박사가 독창진과 합창단 사이의 이상적인 균형을 잡아낸 것이다. 음악이 멎을 때까지 긴장감과 압박감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는 엘가가 의도한 바이다. 어젯밤 사전트 박사는 이 작품을 소유한 단 한 사람의 지휘자였다.



작품은 확실히 전에 찾아볼 수 없던 걸출한 울림을 지녔다. 비록 몇 군데 흠집이 있고, 브람스라면 어떤 바보가 이런 걸 못 알아채겠냐고 비아냥거렸을 테지만. “Go forth”[각주:3] 선율은 품위가 없다. 금관이 요란하게 울리는 전주를 듣고 있자면 확실히 그렇다. 물론 악명높은 파르지팔기사들의 합창만큼 상스럽지는 않다. 다만 그런 이유로 제론티우스를 들으며 단순히 파르지팔을 떠올리면 안 된다. 엘가가 파르지팔에 진 빚은 종종 열렬한 모방 정도로 뻔하게 설명되어 왔다. 고통에 찬 암포르타스의 울부짖음은 작품 내내 들려오며 하나를 꼽자면 작품의 초반부, 그 중 전주곡이다. 딱 한 순간 엘가는 완전히 실패하는데 바로 악마의 합창 장면이다. 일찍이 슈트라우스는 편지를 통해 자기 핏줄에는 독실함이 흐르지 않기에 요제프[각주:4]에게 어울리는 음악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호프만슈탈에게 고백했다. 엘가는 그런 측면에서 독실하고 헌신적이다. 그래서 엘가는 악마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엘가의 악마는 품위있는 밀턴[각주:5]의 루시퍼에 비교해봐도 더 신사 같다. 악마처럼 포악해야 했을 합창의 냉소(冷笑)가 같은 시각 국회[각주:6]에서 들렸을 웃음보다 독기가 적었다 해서 할레 합창단에 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 음악으로 악마를 그려낸 경우는 흔치 않다. 예술이 아이러니 감각을 가지기는 어렵고 이는 전적으로 지적인 문제다. 돌이켜 봐도 오직 리스트 뿐만이 음악에 사악한 기운과 악마의 문장을 불어넣지 않았는가. “제론티우스는 자기 자리에서 위대함을 드러낼 뿐이다. “제론티우스의 화법에서 악한 요소는 가끔씩 나타나지,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다. ‘죽음과 변용을 쓰던 슈트라우스 만큼 엘가는 선명하게 제론티우스를 작곡했다. 한 사람이 사그라지는, 인간의 전부가 소멸되는 무서운 장면을 죽음과 변용만큼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작품 속 천사들의 합창은 듣는 이로 하여금 천국의 광명 또한 체험시키며, 바로 이 지점에서 슈트라우스는 한 수 뒤쳐진다. 슈트라우스에게 천국은 독일 크리스마스 카드 속 그림처럼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론티우스가 보여주는 극적인 대비와 변용은 어떤 음악 보다 생동감 있고 정직하다. 1부를 열어 재끼는 비틀대는 신음과 심장을 멎게 하는 오싹함, 2부에서 보이는 침묵과 영겁의 위력을 생각해보라. 약음기 바이올린이 뽑아내는 사랑스러운 선율은 장면전환에서 번쩍거리며 주제와 공간이 변했음을 알려준다. 대사 “I went to sleep” 뒤에서 반복되는 음표들, 이어지는 “a strange refreshment” 구절중 F음과 함께 올라가는 단어 “strange”를 생각해보자. 어떤 음악도 엘가처럼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감동시키진 못했다.


1957년 리버풀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사전트


제론티우스의 레치타티보중 엘가 본래의 스타일은 절반도 안 된다. 이는 엘가가 고질적인 문제를 꽤나 획기적으로 풀어낸 걸로 보인다. 단조로운 웅변조에서 서정적인 노래를 뽑을 수 있는 적절한 요소들을 찾아내는 문제. 제론티우스의 노래-대사[각주:7] “I hear no more the busy beat of time” 보다 중용의 맛을 더 잘 살려낸 음악이 있었는가? 이런 게 천재적인 음악이 아니라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왜 프랑스와 독일에서 제론티우스를 무시할까? 특히 독일. 1902년 뒤셀도르프에서 독일 초연이 있었는데,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체코, 투르크인[각주:8]이 이런 곡을 작곡했다면, 세계가 그 수준을 인정해 줬을 텐데 말이다. “하모니 속 자유로운 선율에 대해 논하는 지금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부분에서 제론티우스의 레치타티보는 말러를 능가했을까? 말하건대 “제론티우스에서 결함을 찾는 건 쉽다. 양 극단에 치우친 선율들에서 쉽게 드러나는 결함들. 하지만 결함마저 위대함의 일부가 되기에. 우리를 설득하는 아름다움은 옛말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를 들으며 감동할 뿐.




첨언: 엘가는 한국에서 인기 없는 작곡가가 아닐까.(영국 빼면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있으려...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축 늘어진 녹말덩어리 같은 음악을 듣고 있으면 한국인 기질에 이렇게도 안맞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양념 팍팍 무치고 눈물 콧물 잔뜩 빼던가 하는 식으로 코리안 클래식!) 과연 기행의 나라 영국다운 음악일텐데, 그렇다고 벤자민 브리튼처럼 독자적인 독기를 뿜어대는것도 아니고, 본 윌리엄스나 월턴같은 모양새도 아니라서 들어도 들어도 솔직히 잘 모르겠는게 사실이다. 영국 음악 지분은 비틀즈와 똘마니들이 다 가져간게 분명하다.


사전트 역시 비슷한 신세일텐데 어디선가 이 사람한테 "영국음악의 챔피온"이란 칭호를 붙인데서 알 수 있듯이 이건 뭐 전혀 관심 생길만한 거리가 없어서... 뭐 그렇다. 나름 프로의식을 가지고 번역 뒤에 사전트를 찾아서 이것 저것 들어보긴 했지만 좋은건 별로 없고, "제론티우스의 꿈"도 바비롤리가 훨씬 낫더라. 잠깐 덧붙이자면 사전트는 42년까지 할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으로 있었고, 이후 리버풀 필하모닉에서 6년 가까이를 상임으로 재직했다. 사전트와 "제론티우스"는 여러 모로 관계가 깊다. 런던 퀸즈 홀에서 마지막 있었던 공연이 사전트의 "제론티우스"였으며, 공연 직후 저녁 공습으로 퀸즈 홀은 파괴된다. 첨부한 음원은 45년 리버풀 필하모닉과 녹음한 스튜디오 음원이고, 월터 레그가 프로듀싱한 초기의 작업인데, 44년과 45년 각각 아들과 딸이 세상을 떠났던 지휘자의 고통이 잘 드러난 녹음이라고 한다.


한편 이번 글은 더럽게 장황한데다 영어 구조상 뜻이 모호한 부분이 많아 번역하는데 고생했다. 오죽하면 수준 떨어지는 영어가 싫어 라틴어로 일기 썼다던 아놀트 토인비가 생각났을까... 




  1. Angelicals [본문으로]
  2. ‘O generous love! That He Who smote’ : Part 2 후반부의 천사들의 합창 [본문으로]
  3. Go forth upon thy journey, Christian soul!’ : Part 1 마지막 사제와 동료의 합창 [본문으로]
  4. 요제프의 전설 (원주) [본문으로]
  5. 존 밀턴 (John Milton, 1608 - 1674): 기독교 서사시 ‘실낙원’으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본문으로]
  6. House of Commons, 하원의회 [본문으로]
  7. Speech song [본문으로]
  8. Bashi-bazouk : 오스만 제국의 비 정규 기마병.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