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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12: 말러가 승리한 이유 -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년 1월 15일)

by Chaillyboy 2015. 2. 23.

말러가 승리한 이유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 1 15)



1966년 런던 심포니 실황.



수요일 페스티벌 홀. 야샤 호렌슈타인이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 아래 말러는 강력한 승리를 쟁취했다. 나는 많은 9번 교향곡을 들었고, 몇몇은 꽤 유명한 말러리안이 지휘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오늘만큼 악보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적은 없다고 확신한다. 음과 리듬, 팽팽하게 긴장된 현악, 목관의 파토스. 모든 게 시곗바늘만치 정확했다. 금관과 호른은 낭만의 봄바람부터 안치실의 싸늘한 찬바람까지 다양한 소리를 소화했다.


말러의 목소리, 과장 좀 붙여 말러의 유령소리. 어떤 놀라운 최면을 걸었길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낼 수 없었던 그런 소리를 만들었을까. 연주가 끝나자 이 나라에서 보기 힘들 격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젊은이들은 소리 지르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굴렀다. 감동적인 순간이다. 말러가 런던에서 겪었던 고초는 길고 고되었지만, 마침내 안식을 취한 것이다. 잠시 말러를 전파하는 데 힘썼던 첫 평론가 새뮤얼 랭포드[각주:1]에게 감사하며 그를 추억해본다. 아무튼 연주는 호렌슈타인의 위치, 많은 위대한 관현악 해석자들 사이에 자리잡은 위치를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호렌슈타인의 지휘는 확실하게 펼쳐졌으며 머리에 격한 전류를 흘릴 정도로 강렬했다. 작품 속으로 새로운 변화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전류라 할까. 놀랍도록 모든 걸 감싸버린 그 솜씨란! 장황함과 집착에 가까운 자기주장의 측면에서 말이다. 호렌슈타인은 인간 비애를 써 내리며 낭만 교향곡이 가졌을 기교와 심리-다음 세대의 음악을 슬쩍 내다본-또한 한데 뭉쳤다. 호렌슈타인은 마음을 움직이고 말초를 자극하며 날카로웠던 음악 인텔리겐치아까지 사로잡았다. 교향곡의 비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은 음악을 통째로 빨아들였다. 호렌슈타인의 마법에 모두가 빠져든 것이다.


말러가 고전 교향곡 형식을 지켰다지만 그저 큰 얼개만 그렸다 보는 게 맞다. 얼개 속 말러는 특유의 복잡함을 보이며 종종 논리를 생략하기도 한다. 주제선율은 성기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긴 에피소드 속 전개부는 악절 단위로 변주되며 변주는 새로운 싹을 뿌린다. 물론 에피소드는 자기 방식으로 철저하게 교향곡의 내용을 따른다. 말러에게 음악은 삶을 그리는 캔버스였다. 사나이, 살아 숨 쉬는 예술가의 삶을 그리는 캔버스. 말러가 겪은, 분투하며 움켜잡은, 싸우고, 느꼈던 모든 게 음악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물론 말러는 그저 피상적이지 않을뿐 더러 베토벤처럼 음악의 지평선 너머를 집요하게 뚫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에로이카 말이다. 말러 음악에 영웅적인 기지개는 거의 없다. 마음속 악마가 자기절제를 치웠음에도! 음악 속 자기절제는 이 영웅의 업적이다. 말러는 항상 자기 능력 너머를 움켜쥐었다. 경이로운 기교는 한계에 부딪히는데, 듣는 이를 아프게 했던 날카로운 현악이 대표적이다. 또한, 9번 교향곡의 중심 악장, 리듬과 농밀한 선율 속 냉혹한 일갈은 우리에게 친숙했을 향수에 젖은 말러와 상당히 대비된다.


호렌슈타인은 뛰어난 솜씨로 말러를 둘러싼 양비론을 보여줬다. ‘론도-부를레스케악장은 적절한 음색과 긴장감 아래서 매서운 신랄함을 드러냈다. 또한, 호렌슈타인은 으레 생길법한 뻔함 없이, 부를레스케 악장의 경박한 선율과 마지막 아다지오 악장의 슬픈 멜로디 사이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그 특징적인 꾸밈음과 함께 잡아냈다. 심지어 호렌슈타인은 작품의 아킬레스건인 랜틀러-스케르초 악장에도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통렬한 -‘블루스를 미리 듣는듯한- 악절들은 음악의 완급과 더불어 섬세하게 조정되었다. 이를 통해 흔한 연주에서 듣기 힘들었을 조성과 빼곡한 음표 사이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1악장의 개파(改破)[각주:2]는 어둠의 심연, 그 아가리 속에서 튀어나온 유령의 행진을 떠올렸다. 개파의 강력함은 아다지오 악장의 묵직한 음향과 비등했다. 아다지오가 끝날 무렵 모두가 느꼈다. 천국을 바라보지만 종종 지옥으로 향했던 말러의 인생에 드디어 따스하고 꽉 찬 하모니, 즉 평화가 들어섰다는 것을.


평론가의 평범한 일상은 흘러간다. 같은 시각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다양한 음을 연주하며 그저 평범한 일상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때때로 음악이 인간의 탈을 쓴 천재로부터 뛰쳐나와 모두의 삶과 그 장엄함, 비참함, 혹은 신비함을 보여줬다고 나, 평론가는 고백한다. 본 공연이 정확히 그런 순간이었기에......




첨언: 카더스는 생소했던 말러 음악을 옹호했던걸로 유명하며, 이는 듣보가 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몇 안되는 카더스의 모습이다. (보통 뒤 프레 이야기에서 한번 등장하고, 바비롤리나 말러 이야기에서 다시 언급되는 모양새) 당대의 음악가들이 카더스의 영향을 조금이나마 받아 말러를 연주했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이 사람도 음악사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바비롤리는 자신이 말러의 음악에 빠지게 된 데는 카더스의 영향이 크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이 사람 한명이 묻힌 말러를 끌어올렸다는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아무튼 이 사람 평론집에는 말러 공연이 꽤나 들어있고, 하티의 말러 9번 영국 초연의 모습이라던가 유명한 호렌슈타인 말8 공연도 기사가 남아있다. 자기 베프 바비롤리 공연도 물론이고... 물론 대체로 글의 논조는 비슷하다.


이번 글 역시 더럽게 장황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균형감이 살아있지 않았나 싶다. 치열했을 공연장의 열기가 조금이나마 전달되는것도 그렇고... 여담이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현장에서 직관하고 싶은 사람중에 한명이 호렌슈타인이다. 관람객들이 거의 환각에 빠지지 않았을까.




  1. 새뮤얼 랭포드 (Samuel Langford, 1863 - 1927): 영국의 유력 평론가. 맨체스터 가디언의 고정 평론가로 활동했다. 네빌 카더스는 그의 후임이다. [본문으로]
  2. http://wagnerianwk.blogspot.kr/2009/04/%EA%B0%9C%ED%8C%8Cdurchbruch.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