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움 (1968년 8월 30일)
슈베르트 피아노 삼중주 내림 마 장조가 울려 펴지던 저녁. 번뜩이는 천재성이 음악을 완성했다. 가슴이 품고 있던 감정이 격하게 떨렸다. 이스토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번쩍이며 흐르는 선율 속으로 태양빛을 불어 넣었다. 그의 강한 제어 덕분에 아르페지오와 화음은 살아 움직였다. 셈여림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산되고 음악이 가진 골격과 연결되었다. 여기에 스턴의 바이올린, 그리고 로즈의 첼로가 현악선율을 덧붙이며 기쁨으로 화답했다.
슈베르트는 어느 때 보다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향기를 품었다. 꽉 짜인 소나타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온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야생화, 비너발트 1에서 자란 듯 자연 그대로의 우아함을 보이는 음악 속에선 우리가 숭배하는 어떤 음악 형식도 떠올리기 힘들었다. 노래를 즐겼던 슈베르트는 그저 따분하게 흥얼댄다. 긴장이 메아리치고, 피아노와 현이 넘실대며 음을 울린다. 순간, 엄숙이 슈베르트를 뒤덮는다. 예상치 못한 엄숙에 슈베르트는 고민에 빠진다. 단지 세 개의 악기만으로 음악을 풍만하게 감아 올릴 수 있는 감각. 슈베르트는 자기 안에 숨어있는 미묘한 감각을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주절댄다는 사실 또한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 역시 몰랐으리라. 마지막 악장. 행진하고, 춤추고, 성큼성큼 걸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듯이, 첼로는 잊히지 않는 안단테의 선율을 뽑아낸다. 슈베르트는 마침내 평화와 안식으로 향한 듯 보였다.
첨언: 짧은 기사다. 관현악으로 편중된 카더스의 취향/기사들 사이에서 생뚱맞은 느낌까지 드는 실내악 평론이다. 책에 실내악 공연 기사는 이게 끝. 이외에는 작곡가에 대한 에세이에서 드물게 언급되는 정도? 물론 짧지만 글 감각은 그대로 살아있으며, 연주에 대한 이야기가 적은게 아쉬운 정도이다. 카더스의 글을 옮기기로 작정한 첫 번째 이유는 당대의 공기를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은 것이었으니.
스턴-이스토민-로즈 트리오도 레코드사에 스쳐간 수 많은 트리오중에 하나로 잊혀진 듯 싶다. 물론 셋 모두가 거장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늙은 스턴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겠지만,일단 셋 중에서 제일 밀리는 스턴이라 해두자) 이스토민과 로즈 모두 알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이고... 레코드상으론 번뜩이는 케미나 흡입력은 부족해 보이는데, 다들 나이를 자셔서 그런가 싶다. 현명함 대신 무심함을 보이는 노인이라 해야되나.
- 알프스의 지류에서 빈을 향해 뻗어나온 삼림지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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