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의 황금 – 정렬과 균형에 대한 켐페의 감각 (1957년 9월 27일)
Opera지 1957년 9월호
수요일 밤.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가 또 다른 “반지”를 보여주기 위해 바닥을 치우고 새 단장을 했다. 바그너의 장대한 4부작. 신성에 대한 염원과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영원한 갈등. 갈등의 중심에서 피어나는 도덕 법칙은 고귀한 피조물과 그들의 세계까지 자기 방식대로 깨뜨린다. 약동하고 증폭되는 시원(始原)의 동력이 “라인의 황금”의 세계를 힘껏 열어재낀다. 전주곡의 첫 E-flat 화음은 깊은 곳에서 물 흐르듯이 피어오르며, 모든 게 시작된다. 여기 피트에서 조화로운 우주의 원형질이 솟아오른다. 모든 분노와 법열, 다가올 종말의 시발(始發)이다.
“반지”는 오케스트라에게 모든걸 맡긴다. 바그너식으로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에서 모든 목적은 열매를 맺는다. 코벤트 가든 “반지”의 지휘를 계속 맡아온 루돌프 켐페는 또 한번 극도의 명료함을 만들어냈다. 체계적인 문명의 모습. 어떤 “라인의 황금” 공연에서도 이렇게 뚜렷한 아티큘레이션을 들은 적이 없었다. 가수들은 단 한 차례도 묻히지 않았다. 가수들이 모든 단어와 억양에서 역량을 드러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또한, 극장의 어두컴컴한 심연에 관현악의 세세한 부분이 묻힐 일도 없었다. 켐페가 보여준 “라인의 황금”은 신중하되 품위 있었고, 균형이 잘 잡혔으며, 모든 부분에서 수긍할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가 언젠가 지나가듯이 말한 바 “살로메”를 멘델스존의 음향처럼 지휘해야 한다지 않았는가. “켐페”가 지휘한 부드럽고, 치우치지 않은 전주곡에선 참으로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이 떠오르는 듯 했다. 태초의 자궁으로부터 서서히 커지고 겹쳐지는 그 전주곡 말이다.
켐페 박사의 다양했던 공로에 대해서 집중할 필요가 있다. 깊은 곳에서 퍼지는 장엄한 울림은 나지막하게 전달되었다. 이를테면 적막하되 아름답게 흐르는 라인강. 속이 보이지 않는 흐름이랄까. 니벨하임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막히고 생생한 관현악의 목소리가 바톤 아래서 멋지고 균형있게 정돈되었으니. 타는듯한 지하세계, 악과 탐욕의 세계로 도착한 뒤에도. 무대의 연기는 오케스트라에 전혀 도달하지 못한걸로 보였다. “라인의 황금”속 간주곡은 상승과 하강의 대조를 극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켐페 박사는 시종일관 악보를 탁월하게 다듬어나갔는데, 한편 듣는 입장에서 절정에 달하는 느낌은 적게 받았다. 이는 켐페가 적은 진폭을 가능하게 하는 음계를 세워나갔기 때문이다 1. 켐페가 요구했던 까다로운 사항들은 모두 성악을 명료하게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게 많은 바그너 지휘자들이 보여줬던 불협화음으로 저지르는 만행과 다르단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오늘날의 취향이 성악을 가장 강조하는 옛 바그너 스타일로 향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바그너 미학에 비추어 보건대, 특히 “라인의 황금”에서 단어의 음조는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화음으로부터 싹터야 한다. “라인의 황금”에서 바그너는 여러 유형과 요소, 혹은 신에 대한 상징들을 제시한다. 바그너는 아직 구체적으로 개개인에 표상되는 것들을 말하지 않았으며, 보탄 자신도 인간에 의해 족쇄 같은 신성이 부여됬고, 종말의 운명 역시 넌지시 드러난다. 자. “라인의 황금”에서 오케스트라의 음향이야 말로 중요한 요소다. 거기 울리는 모든 화음과 화성의 변화는 “태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멈출 수 없는 두려움이 빚어진다. 형태를 갖추고, 혈관에 새겨진다. 결국 거칠게 박동하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거란걸 “라인의 황금”에서 느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뺀다면 연주는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게끔 훌륭했다. 바그네리안과 안티-바그너를 모두 만족시킬 공연이랄까. 보탄으로 열연한 호터는 이제 이 역할에서 적수가 없다. 그는 “라인의 황금”에서 이미 자신을 고귀하게 만들 비극-딜레마, 그리고 발할-열전(列傳)은 꿈꿀 수 없을 순교를 암시한다. 알베리히 역을 맡은 오타카 크라우스는 보탄을 넘어설 위엄을 달성했다. 어찌됬건 알베리히는 “반지”의 인물들 중에서 끝까지 가장 정직하지 않는가. 크라우스는 보탄과 로게의 결박에서 풀리는 장면을 정말 뛰어나게 소화했다. 보탄과 로게가 그를 묶고 너는 자유롭다고 조롱하는 장면 말이다. 우리는 이제 운명과 양심의 쇠고랑이 보탄을 묶었다는 걸 알고 있다. 게오르기네 본 밀린코비치는 명령보다는 동정 어린 프리카를 연기했다. “에리히 비테”의 로게는 대체로 일류의 모습이었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모습이 필요해 보였다. 특히 마지막 대사 “저런 자들과 어울린다는 게 수치스럽구나” 를 생각해 본다면. 미메로 나온 페터 클라인은 “지크프리트”에서 선보일 미메를 벌써부터 보여주는 듯 했다. 쿠르트 뵈메의 파졸트 또한 그 목소리의 명성을 잘 보여줬다. 진짜배기 바그너 성악이었고, 에르다의 마리아 폰 일로스바이 역시 마찬가지다. 라인의 처녀는 기량이 들쭉날쭉했다. 마치 이어지는 발레 공연처럼 라인 강 바닥에서 춤추고 싸돌아 다니는 듯 보였다. 난 항상 처녀들이 꼬리를 입었다고 생각해 왔건만.
첨언: 57년 공연이다. 테스타먼트로 정발된 바 있는 57년 실황은 좋지 않은 음질과 몇몇 구멍을 따져본다면 그 역사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어야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테스타먼트에서 정발까지 했으니....
카더스의 논조는 55년의 글과 비슷하다. 다만 이어질 발퀴레 기사에서 터지는 분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마 루돌프 하르트만의 연출이 라인의 황금에선 크게 거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라인의 황금에서 바그너가 하란 연출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자체가 역사에 남을 일이기에 카더스도 그냥 눈 감아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수들도 흠 없이 노래한 것 같고.. 오타카 크라우스에 대한 평은 수긍하는 입장이다. 연기력도 출중하고, 목소리도 걸쭉한게 극장에서 실제로 보면 더 좋을 스타일. 이아고나 빨리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목소리에 깊은 악함이 녹아있는게 이아고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라서...(이어질 신들의 황혼 글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호터도 뭐 그 실력 어디 가는게 아니고.. 뭐 그렇다.
- Simply because he established a tonal scale on which little rise and fall was possible. 정확한 뜻을 잘 모르겠네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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