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퀴레 – 비르기트 닐손 (1957년 10월 9일)
57년 9월 Opera지 발췌
금요일 1 “발퀴레” 공연이 있었다. 연주는 악보에 충실했으며, 브륀힐데의 등장이 런던을 뜨겁게 달궜다는 소식이 금새 퍼졌다. 비르기트 닐손은 명료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지녔으며 때론 청자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수려한 외모는 덤이다 2. 약간의 연륜만 더 쌓인다면 지금에 비해 훨씬 심원한 저음을 들려주리라. 닐손은 이미 사려 깊은 성악기교를 구사하며, 보탄이 그녀를 벌하던 뛰어난 장면이 그러했다. “O sag’ , Vater! Sieh mir ins Auge 3”에서 닐손은 파토스를 밑바닥부터 자연스럽게 끌어냈으며, 지금 없애려 하는 벨중을 창조한 건 보탄 당신이라고 알려주는 “Du zeugtest ein edles Geschlecht 4”에서 감동적으로 자긍심을 일으켰다.
루돌프 켐페는 다시금 훌륭한 균형감을 선보이며 지휘했고 가수와 투명한 관현악 짜임새가 한 순간도 빠짐 없이 드러나도록 했다. 허나 진폭과 충격력이 부족했던 1막에선 뜨거움은 물론 짜릿한 음악을 느낄 수 없었다. 켐페가 노래와 선율에 집중하면서 성악가들은 주어진 거의 모든 기회를 살려낼 수 있었고, 또한 그의 해석 덕분에 관현악의 실타래들이 세세하게 보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즉 이런 해석은 악극-노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그너의 생각과는 반대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일찍이 바그너께서 화성은 음악의 요람 속 가장 기본적인 성분이라 하셨다. 멜로디는 반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4편 중 가장 서정적인 “발퀴레” 역시 마찬가지이다. 반지의 멜로디는 종종 관현악의 땅울림에서 나온다. 멜로디는 화음의 연장선상이자 변형된 모습이며, 지휘자의 창의적인 조정과 마무리가 필요하다. 반지에서 멜로디는 인물 개개인의 어떤 모습과 일시적인 순간을 드러낸다. 또한 멜로디는 항상 관현악의 모-세계와 연결 되어야 한다. 요컨대 반지의 관현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반대편에서 모든걸 옭아매는 운명인 것이다. 운명의 실타래를 돌리는 노른들을 쳐다보기 위해 “신들의 황혼”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반지를 연주하는 모든 기악 주자는 노른 그 자체이며, 자기 궤도에 주어진 일을 다 할 뿐.
한스 호터가 우리 앞에 나타나며 연주는 올바른 모습을 드러냈다. 호터는 보탄과 함께 근엄함과 감정의 진폭, 신성의 모습으로 저녁을 가득 채웠다. 보탄이 좌절하는 장면 “O heilige Schmach 5”은 환상적이었다. 덜 극적이고 미묘한 장면에서도 호터는 절창을 들려 주었다. 이를테면 브륀힐데에게 그녀는 가장 현명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Als junger liebe 6”의 섬세했던 울림이 그렇다.
기대를 져버린 1막이 끝난 뒤에야 저녁공기는 뜨겁게 달궈졌던 것이다. 프로덕션의 몇몇 덧없던 1막 장면들을 이 지면을 통해 꼭 이야기 해 보고 싶다. 1막의 위대한 순간을 생각해 보자. 훈딩이 사는 집 문이 활짝 열리며 봄기운이 흐르는 밤의 어둠 너머로 달빛줄기가 연인들을 비추는 장면. (물론 바그너의 지시를 그대로 따를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지글린데가 “앗! 누가 들어왔나요?”라고 물어보자 지크문트는 “아무도 아니에요. 봄기운이 방에 들어와 웃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번 코벤트 가든 연출에는 훈딩의 집에 어떤 문도 보이지 않았다. 전기기사들이 일하는 천장에서 녹색 전등불이 내리쬘 뿐이었다. 어둡고 불길해 보이는 훈딩의 집과 대비되는 달빛아래 고요한 숲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 공간 속에서 서서히 피어 오르는 지크문트와 지글린데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바그너가 만든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이 헛되이 지나갔다.
훈딩이 지글린데를 따라 방 안으로 퇴장하는 장면 역시 문제였다. 바그너는 난롯불이 꺼지기 전에 지크문트가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라고 지시했다. 불꽃이 깜박거리며 물푸레나무를 비추는데 이는 지글린데가 앞서 눈짓했던 곳이다. 불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방을 뒤덮고 지크문트는 나무에서 여주인의 시선을 보았다고 비현실적으로 생각한다. 이번 코벤트 가든 연출에서 지크문트는 앉지 않았다. 그저 실직자마냥 뻣뻣하게 서서 있었다. 그저 전기기사들이 높은 곳에서 불빛을 쐈고, 꽂혀있는 칼자루가 저 멀리서도 금새 보인다고 광고하는 듯했다.
요새 바이로이트처럼 오래된 리얼리즘을 버리고 그 자리를 상징으로 채우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단언컨대 바그너의 적합한 리얼리즘을 대체할 만한 다른 리얼리즘은 없다. 다 엉뚱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훈딩과 지글린데, 지크문트는 생기있는 움직임과 몸짓으로 살아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 서서 오케스트라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 곳엔 누구를 위한 자리도 없었다. 바그너가 나무 의자와 탁자를 주문했음에도 말이다. 훈딩은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멋들어지게 수염과 머리 숱을 다듬었다. 하지만 명심하자. 매끈한 훈딩이 과연 훈딩일까. 그런 모든걸 고려할 때 지크문트와 지글린데는 훈딩이 타른헬름을 뒤집어 쓴게 아닌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첨언: 음악을 아는 연출가와 음악을 모르는 연출가. 연출을 평가할 떄 고려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오페라는 단순한 극이 아니며, 그리고 단순한 음악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바그너같이 자기가 직접 대본을 쓰는 경우라면 더욱더. 일반적으로 오페라를 볼때 작곡가의 의도를 따지곤 하는데, 그렇기에 바그너의 경우 대본의 지시사항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예컨데 베르디를 보며 피아베의 의도가 묵살됬다는 이야기는 안 하지 않는가. 바그너의 지시사항이 무시된건 어찌됬던 '바그너'가 묵살된거니까)
카더스의 의도도 뭐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다만 마지막 문단을 읽어보면 당시 논란을 가져온 신바이로이트 양식에 대해선 또 불만이 없어 보이는데, 이건 그냥 손자가 하는거니까 맞겠지 이런 마인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카더스가 30년대 바이로이트 티티옌과 프레토리우스의 연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가 궁금하긴 하다. 당시 대중들이 바그너의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고(발퀴레 3막의 소나무를 가지고 문제를 삼았댔나) 불만이 많았다는데, 본 공연의 연출가인 루돌프 하르트만 역시 37년부터 연출을 시작한 사람이니 비슷한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카더스의 불만과 독일인들의 불만도 비슷하지 않는가. 7
하르트만의 경우 당대의 명성과 무관하게 거의 잊혀저 버렸는데, 지금으로선 카라얀의 60년 잘츠부르크 "장미의 기사" 개관실황의 연출을 맡았다는 그런 이야기나 먹힐듯? 영상물의 세례를 받기 조금 애매한 세대였다는게 가장 큰 아쉬움일 것이다. 델라 카사가 제일 존경하는 연출가였고, 슈트라우스와도 친분이 있고, 뮌헨 극장장을 맡은 거물인데도 알려진게 거의 없으니...
이번 글도 카더스 식 몰아주기가 심한 편이다. 지난 글에선 모두를 정화하는 지글린데를 말씀하셨지만, 이번엔 아무 언급도 없고. 지글린데가 구려서 그런가보다 생각해야 겠다. 비나이 역시 전혀 언급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도 삼천포로 빠지지는 않고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쭉 하고 있으니 딱히 불만은 없다.
- 1957년 10월 4일 [본문으로]
- ??????????????????? [본문으로]
- 3막 3장의 대사 “말씀하세요, 아버지! 제 눈을 보세요” 원문에는 Sieh가 sich로 오타가 났다. [본문으로]
- 3막 3장의 대사 “아버지께서 고귀한 가문을 만드셨으니” [본문으로]
- 2막 2장의 대사 “부끄러운 일이요, 수치스러운 고민이구나!” [본문으로]
- 2막 2장의 대사 “내 몸이 젊고 사랑의 힘으로 가득 차 있을때” 원문엔 Als junge liebe로 오타가 났다. [본문으로]
- 여담이로 월터 레그는 평론가 시절 30년대 바이로이트를 관람한 뒤, 구리구리한 코벤트 가든의 연출과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라 30년대 바이로이트를 평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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