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잡설/번역 - 네빌 카더스 평론

카더스 평론 18: 잘츠부르크의 "명가수" - 토스카니니가 통제하다 (1936년 8월 28일)

by Chaillyboy 2016. 12. 15.

잘츠부르크의 “명가수” – 토스카니니가 통제하다 (1936년 8월 28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슈테판 츠바이크. 1936년 잘츠부르크)


1936년 8월 8일 실황 녹음


미국과 잉글랜드의 부자 방문객들이 전통의상을 구매하고 깔끔하고 비싼 자가용으로 산을 오르는 등의 기행을 벌이지만, 여전히 잘츠부르크는 잘츠부르크다. 축제가 한물갔다는 보도자료에 진실은 없다. 물론, 토스카니니가 가져온 율법이 이곳의 편안하고 상냥한 분위기에 어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페라와 음악축제로서 잘츠부르크의 질이 떨어졌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나는 며칠간 저녁 공연을 관람했다. 미학적인 성취와 기술적인 마감 모두 세계 어느 곳에서든 쉽게 뛰어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잉글랜드 극장의 성과는 잘 봐줘야 아마추어 수준으로 만들어 버린 순간이었다. 


토스카니니가 정해놓은 이상은 너무 높아서 자신과 같은 천재만이 – 다채로운 손기술로 처리 가능한 경지에 있다. 토스카니니의 지휘 아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풍성함과 광채가 살아있던 능숙한 옛날의 손길을 되찾았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들은 최고와 지리멸렬을 오가며 들쭉날쭉하게 연주한 것이다. 심지어 피아니시모가 실종되기도 했었다.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를 새롭게 만들었다; 여기엔 그의 무자비함, 완벽함에 대한 열정, 근면함에 대한 그의 가식 없는 신념이 필요했다. 어느 비평가가 음악에 대한 미묘한 직관과, 심리적 통찰력, 기타 등등을 물어봤고 토스카니니는 불성실하게 들으며 답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악보를 공부하오”라는 불문율과 함께, “주자들이 거기 적힌대로 연주하도록 만들지”라는 결론이었다. 토스카니니를 작품으로 이끄는 건 가장 희귀한 종류의 재능으로서, 음악을 순수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자질 – 과 노련함 – 은 그를 설명하기에 충분한데, 이걸 줄이면 ‘천재’가 될 것이다. 



그의 “명가수”는 내 마음에 평생 남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그에 비례하는 품격 때문이다. 방대하게 굽이치는 작품의 꿈틀대다 가라앉는 에너지, 무수한 세부사항, 그 어떤 것도 잃지 않았다. 예술이 환상이란 걸 잊은 채 작품의 총체적인 황금빛 세계로 들어가자 오페라 전체가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세계가 안락함과 따스함을 보인 건 아니다; 토스카니니는 첫 막을 어느 정도 딱딱하게 선보였다; 명인 가수들은 일직선에 발을 맞췄고, 발터에게 설명하는 다비트는 청년으로서의 그의 덕목을 기사와 장면 전체에 선보일 시간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토스카니니의 라틴적인 명료함을 참기 힘들었다; 부풀다가 줄어드는 유머를 원했지, 몸을 줄여 각을 잡는 날카로운 재치를 바란 게 아니었다. 아마 이 해석에서 리히터[각주:1]의 넉살 좋은 유머를 찾을 순 없을 텐데, 그런 온화한 웃음은 촌철살인의 채찍 소리에는 도무지 쓰일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토스카니니가 2막을 끝내기도 전에 기적 같은 재창조가 완성되었다. 단어 몇 개로 뉘른베르크 장면 전체를 휘감은 여름밤의 마법을 전달하기는 힘들다; 작스의 유연한 첫 독백; 에파와 작스의 장면, “Gut’n Abend, Meister”에서 꾸준히 만개하는 미감, 구두 수선 노래를 반주하는 관현악의 생동감; 거리의 쌈박질을 반주하는 믿기지 않는 크레셴도의 제어, 싸움의 혼란에서 모든 걸 책임진 중심 모티프, 참으로 분명했고 음악적인 전체 짜임새는 우리 시대 최초가 아니었을까. 그러자 디크레셴도, 야경꾼의 나팔과 부름이 이어지고, 사랑스러운 전조는 서정과, 한산함을 부르며, 세밀하게 사그라들었다. 연주의 맵시와 살아있는 형상은 1막 이후로는 우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오페라가 끝날 때, 노래의 기치는 관대함과 고결함을 열어 재끼며, 우리에게 행복과 슬픔,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고, 삶과 그 자부심을 느끼게끔 하였다. 토스카니니는 우리를 오래된 옛날 광채로 빛나는 난롯가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만든 것이다. 


  

연출은 잘츠부르크의 작은 무대를 영리하게 묶어 재간 넘치게 사용했다. 2막 장면은 뉘른베르크의 중구난방 골목거리를 보여줬는데, 박공지붕은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등장인물은 높은 곳에서 걸어 내려오며 원근감을 만들었다. 아수라장의 액션은 아슬하게 변화무쌍했는데, 다른 연출은 이 장면을 지나치게 과장스럽게 표현하곤 했다; 세부사항은 생생했고 – 마치 롤런드슨[각주:2]의 중세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3막 전주곡: 천천히 움직이며, 귀족적이고 동시에 짓누르지 않는 비애감을 가득 채웠다. 이 연주는 바그너를 극장 협잡꾼이라 수군대는 요즘 세태를 비웃었다; 이런 전주곡을 쓴 남자는 세 음악신 중 하나가 분명했으니. 전주곡이 끝나고, 노래는 파도처럼 흘러 피날레를 향한다 – 작스를 흠모하며 부르는 에파의 가슴아픈 외침; 모든 것을 화려하고 동시에 슬프게 만드는 화해의 오중창; 색채감과 셰익스피어적인 사랑으로 모든 인본주의을 외치는 목초지 장면; 작스에 대한 경의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음악 – 모든 게 삶을 긍정하는 상쾌한 정오를 바라본다.


우리는 여기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축제극장을 떠났다. 평생 바이로이트를 찾아온 베테랑들조차 이렇게 통째로 아름다운 “명가수”를 본 적이 없다며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인간은 여러 번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삶은 흐르고 토스카니니를 – 음악사상 가장 슬기롭고 거대한 희극에 대한 그의 해석을 그리워할 것이다; 이걸 들은 건 특권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더욱 나아질 여지가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앙상블을 달성한건 토스카니니였다. 레만의 음성과 외모는 이제 마샬린과 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에파처럼 정말 다정하게 노래했다, 하지만 노련함보단 천진난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니센의 작스에선 감탄이 나왔고, 발터를 부른 쿨만은 내가 들은 것중 성악적으로 최고였다: 게다가 젊어보이기까지 했으니. 예선 노래를 부를 때 발터는 베크메서를 두려워지 않고, 긍지와 열정으로 베크메서와 모든 명인에게 도전하는 듯 했다. 이것이야말로 어제 저녁을 최고로 빛낸 순간이었다.



네, 토스카니니 <명가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네빌 카더스는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잘츠부르크 축제에 참석합니다. 매년 글을 남겼겠죠. 아쉽게 제가 가진 기사는 1936년 <명가수>가 전부네요. 디테일보단 분위기를 흥얼대는데 특화된 사람답죠. 글에 자세한 상황이 담기질 못하고... 저만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기사를 옮긴 계기가 된) Immortal Performances 협회의 신보에는 카더스의 글이 실려있지만, 많이 잘렸습니다. 쭉정이는 다 날리고 싶었겠죠. 이해합니다.


잘츠부르크의 토스카니니는 여러 매체에 묘사가 잘 되었습니다. 이덕희의 평전을 펼쳐보죠. 장단점이 뚜렷한 이 책의 2부에는 당시 빈 필의 수석 바순주자(이자 오케스트라 의장이)였던 휴고 부르크하우저, NBC 교향악단 창립에 큰 역할을 한 비평가 새뮤얼 초트치노프의 회고가 실려있습니다. 전자는 글이 난삽하고 후자는 단조롭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1930년대 토스카니니를 묘사하며 잘츠부르크 역시 적지 않게 할애를 했죠. 토스카니니 바그너에 대한 자료와 의견 역시 풍부하고요. 이외에도 여러 평전을 찾아보시면 좋은 보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토스카니니는 <피델리오>와 <팔스타프>, <명가수>, <마술피리>를 잘츠부르크에서 지휘했습니다. 관현악 기록은 훨씬 방대합니다. 상당히 넓고, 또한 단단한 레퍼토리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의 주요 작품으로 시작해서,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멘델스존이 포함됩니다. 띄엄띄엄 남은 녹음도 모두 이쪽 레퍼토리입니다[각주:3].


중요한 건 빈 필하모닉에게 생소할 작품입니다. 드뷔시, 베를리오즈, 레스피기(바흐 편곡)에서 시작해서, 본령인 베르디와 로시니는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금은 잊힌 칼 골드마크의 교향곡까지 연주했어요. 흔히 악보에 대한 사진기 같은 기억력만 언급되곤 하는데, 토스카니니는 음악사에 대한 지식 역시 전무후무한 수준이었죠. 세간의 편견처럼 그저 윽박지르며 음악가들을 이끌고 가는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르농쿠르처럼 학구적인 아우라가 그를 감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대한 레퍼토리를 어떤 오케스트라에도 밀어붙이는 힘이죠.


토스카니니의 잘츠부르크 보조 지휘자는 에리히 라인스도로프였습니다. 38년부터 라인스도로프가 메트의 상임이 되었단 걸 생각한다면, 과분할 정도의 보조 지휘자였겠죠? 그가 아니더라도 잘츠부르크 토스카니니를 증언할 인물은 수없이 많습니다. 조수로 <마술피리>의 첼레스타를 연주한 게오르크 솔티, 사생팬 수준으로 공연을 쫓아다닌 카라얀, <팔스타프> 1막이 끝나고 열광하며 객석 앞으로 뛰어갔다는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정치질로 토스카니니를 몰아내려 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와 열등감 쩌는 푸르트벵글러마저 이탈리아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또다른 기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스 작스를 노래할 가수는 프리드리히 쇼어였습니다. 감기였는지, 고음이 안나와서 공연을 며칠 앞두고 교체되죠. 아쉽진 않습니다. 모두가 말하듯이 한스 헤르만 니센은 단순한 대체제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1936년 메트라는 대안도 있고... 아쉬운건 쿨만의 발터겠죠. 1937년 연주에 통째로 남은 헹크 누트 역시 흠이 없지만, 토스카니니와 쿨만이니까...  (12번 트랙) 


레만에 대한 언급이 재밌죠. 라이닝이나 레만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아니잖아요. 잠깐 그륌머랑 번갈아 들었는데, 이쪽은 순박한 요조숙녀에 가깝네요... 물론 꼭 에파가 천진난만하고 깃털처럼 날아다닐 이유는 없습니다만, 설득력 있긴 합니다. 적어도 순음악적으론요. 대비가 확실해서 듣는 맛이 있죠. 라이닝에서 느낀건데 다른 인물과 너무 잘 섞여요. 가족 삼중창같은 느낌? 물론 발터, 작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최고의 에파는 누굴까요? 렘니츠 좋고, 델라 카사도 호감이지만, 일단 저라면 그륌머 초이스.


1936년 연주에서 레만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건 뼈아프죠. Immortal Performances 신보는 펠릭스 바인가르트너가 지휘한 오중창 일부를 수록해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1935년 빈 슈타츠오퍼. 바인가르트너, 레만-에파, 라홀름-발터, 호프만-작스, 토르보리-막달레나, 베르니크-다비트)



  1. 한스 리히터 [본문으로]
  2. 토마스 롤런드슨: 18-19세기 영국의 풍자화가 [본문으로]
  3. 전원 교향곡과 죽음과 변용, 신들의 황혼 관현악곡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