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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번역 - 월터 레그 평론

월터 레그 평론 01: 히틀러씨와 함께한 바이로이트 축제 (8월 1933년)

by Chaillyboy 2016. 2. 21.

8월 1933년. 히틀러씨와 함께한 바이로이트 축제[각주:1]


(1933년 바이로이트)

지나가던 행인이 이번 바이로이트에 방문해서 바그너 축제를 히틀러 축제로 헷갈렸다 하더라도, 그건 용납할 수 있는 실수가 되었을 것이다. 앞선 축제들에선, 모든 상점이, 어떤 물건을 판매하던 간에, 갈고리나 막대기를 이용하여  바그너의 사진이나 얼굴이 담긴 제품을 진열해놨었다. 십수개의 세라믹 바그너들이 도자기점 창문 너머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서점에는 바그너 자서전이 진열되어 있었다. 올해는 히틀러 기념판이 도자기점들을 가득 채웠고, <나의 투쟁>이 <나의 인생[각주:2]>을 대체했다. 모든 깃대와 보이는 창문마다 스바스티카가 휘날렸다. 갈색 셔츠를 입는게 사실상의 드레스 코드가 되었고, “탄호이저 카페”와 “라인골트 여관[각주:3]”을 지나갈 땐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만 들렸을 뿐이다.


히틀러씨는 축제의 첫 여섯 공연을 관람했는데, 관객의 반응은 마치 “이건 히틀러 축제고, 히틀러가 바그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도 여기 와 있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수천의 인파가 히틀러의 숙소에서 축제극장 사이의 거리를 따라 몰려들었는데, 외국인을 제외한 청중들은 극장 바깥에서 환호성을 지르기 위해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자기 좌석으로 빠르게 이동한 뒤에는 조명이 꺼질 때까지 그의 박스석을 탄복하며, 경건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막이 끝날 때 마다 무대에서 총통의 박스로 잽싸게 시선이 옮겨갔다. 그리고 업무때문에 히틀러씨가 베를린에 붙들렸을 때, 이천명의 관객들은 그가 자기 좌석에 앉을 때 까지 한 시간 반 가량 오페라를 기다렸다.


이렇게 드러난 독일 국내 정치가 예술에만 관심이 있는 세계 음악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줬다고 가장해 봐야 소용없다. 안타깝게도, 바이로이트에 히틀러가 끼친 영향은 표면적인 볼거리에만 그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정책 때문에 우리는 토스카니니의 존재를 빼앗겼고, 그 결과로 <명가수>와 <파르지팔> 연주는 우리가 오, 육년 전 표를 샀을 때 기대했던 그 수준에 비해 상당히 나빠졌다. 토스카니니는 책임이 없다 – 그가 물러났다고 해서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순 없다.


음악 보호주의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토스카니니의 전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히틀러에게 불쾌한 고민거리를 남겼다.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뉴스가 공개된 이후 외국인 출연진과의 계약이 거의 중단되었고, 전 세계에서 수백건의 예약취소가 잇따랐다고 한다. “독일 예술을 독일 예술가에게” 라는 케케묵은 나치의 구호를 만들어낸 국민적 자부심은 크게 상처받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게 국민적 자부심일까? 나치가 설득한 유명한 독일 음악가들과 이야기 하며 나는 그들의 동기가 공포심이라고 확신했다. 최고의 해석가들은 대체로 외국인이고 몇 안되는 일류 독일 음악가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독일 연주자들은 실망감을 보여왔다. 그들은 세계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엘만과 메뉴힌, 하이페츠, 후베르만, 짐발리스트가 모두 러시아인이나 폴란드인, 유대인이라는 사실; 피아니스트 슈나벨은 독일인이지만 유대인이며, 라흐마니노프와 호로비츠는 러시아인, 파데레프스키와 루빈슈타인은 폴란드인, 코르토는 스위스인이라는 사실;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이탈리아인이며, 쿠세비츠키는 러시아인이자 유대인, 그들의 클렘페러와 발터는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의식해왔다. 바그너 성악쪽을 살펴봐도 전전(戰前)에 가졌던 우세는 모두 그들의 손아귀를 빠져 나갔다. 저명한 바그너 소프라노를 살펴 보자면, 레만과 라이더가 독일인이지만(하지만 나는 그들이 러시아 혈통이라고 확신한다),  융베리와 라르센-토드센은 스웨덴인이다. 콘트랄토쪽에서 올체프스카는 어머니가 루마니아인이었고, 카린 브란셀은 스웨덴인이다. 세계 최고의 드라마틱 테너인 멜히오르는 덴마크인이며, 그의 가까운 라이벌 그로루드는 노르웨이 사람이다. 바리톤 중에서 얀센과 보켈만은 순수 독일 혈통이지만, 가장 인기있는 쇼어는 헝가리 유대인이다. 그리고 사실상 독일 베이스는 없다. 키프니스는 러시아 유대인이고, 리스트는 오스트리아 유대인이며, 안드레센은 노르웨이인이다. 적어도 음악적으로, 독일의 광적인 내셔널리즘은 대개 열등한 자국 결과물을 우월한 외국과 경쟁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보호다.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많은 이들이 유대인 현악이 빠진 바이로이트 오케스트라는 이전의 훌륭한 수준에 못 미치리라 예상했지만, 축제 기간을 통틀어 그런 악화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합창단의 노래 모두 최고로 우수했으며, 그 정확성과 일체감, 세부적인 절묘함은 짜릿했다. 이는, 에밀 프레토리우스의 무대와 하인츠 티티옌의 연출과 함께, 축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잉글랜드에 사는 우리는 코벤트 가든의 질 나쁘게 채색된 의상과 충분하지 못한 무대 시스템, 순회오페라단이 임시변통으로 꾸민 무대에 적응되어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지난 십이년간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오페라 연출의 발전에는 별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런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이들도 무대 예술가 에밀 프레토리우스와 제작자 하인츠 티티옌이 바이로이트 프로덕션에서 이루어낸 극의 강력함과 냉혹한 사실주의에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만약 한 시즌 동안 바이로이트에서 제작한 바그너 음악극을 영국 극장에 올린다면, 거대한 레뷔[각주:4]와 희가극 종사자들은 그들의 에너지를 위해 다른 방출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프레토리우스와 티티옌은 극적인 진실을 부여했으며, 바그너 극의 진실은 다른 어떤 종류의 극예술도 능가하는 것이다.


(에밀 프레토리우스의 1933년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2막 무대)


독일 여당의 내셔널리즘적인 시각을 고려한다면, 가수 캐스팅은 놀랄만 했다. 콘트랄토 시그리드 오네인 (스웨덴)과 에니드 선토 (아일랜드계 헝가리)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테너들은 독일인이었는데 예외적으로 프란츠 푈커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축제를 통틀어 최고의 가창은 체코 소프라노 마리아 뮐러와 독일 바리톤 루돌프 보켈만 (보탄과 작스), 두 명의 유대인 베이스 에마누엘 리스트 (훈딩과 파프너, 하겐), 알렉산더 키프니스 (티투렐과 포크너)로부터 나왔다.


최근에 발매된 <음악신보[각주:5]> – 슈만이 창간한 – 에서 나는 히틀러의 내셔널리즘 정책에 대한 이런 찬사를 찾았다.


“곧 독일 오페라 하우스는 독일 예술가에게 빵을 줄 것이며, 독일 음악 양성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우리 음악당에서 독일 예술가들의 귀환과 독일 작품을 보게 될 것이다 (…) 외국의 벌레들로부터 해방된 독일 땅은 독일 작곡가에 의해 독일 민족에 남겨진 작품들 속에서 다시금 기뻐하게 될 것이다. (…) 독일 예술가 만이 이 땅에 속할 수 있다.”


토스카니니의 부재가 이번 바이로이트 축제를 사실상 붕괴시켰다는 걸 깨달았을 때 글쓴이는 얼마나 초라함을 느꼈을까. 바그너 가문은 히틀러의 존재와 무료 좌석/숙소를 제공하기 위한 특별 보조금, 젊은 나치당원들의 방문 덕분에 축제 극장의 좌석을 매 공연마다 겨우 채울 수 있었다.


토스카니니를 대신하여 바이로이트의 지휘봉을 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파르지팔>을 지휘했고, 카를 엘멘도르프는 원래 일정에 더하여 <명가수>를 지휘했다. 이십여년 전의 슈트라우스라면 청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겠지만, 1933년 지금 지휘자로서 그의 위대했던 시간은 끝났다. 엘멘도르프는 평범한 재능의 예술가일 뿐이다.


(루돌프 보켈만, 카를 엘멘도르프, 비니프레트 바그너. 1933년 바이로이트)


발터와 블레히, 클렘페러는 인종적인 이유로 계속해서 실직중이지만, 내 생각에 헤거 혹은 클레멘스 크라우스, 크나퍼츠부슈, 클라이버는 엘멘도르프보다 낫다. 물론 이건 엘멘도르프가 따분하고 느릿느릿하게 지휘한 <명가수>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푸르트벵글러는 오케스트라를 덮은 덮개막을 치우기 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지 않겠다고 요구한 다음부터 선택지를 떠났다. 만약 독일에서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바그너 지휘자가 엘멘도르프라면, 우리는 독일 지휘자만이 출연이 허락된 땅에서 살아야 되는 지적인 음악 애호가를 불쌍하게 여기는 수 밖에 없다. “독일 예술을 독일 예술가에게”는 독일 땅에서나 걸맞을 소리다.


슈트라우스의 <파르지팔>


(바이로이트,1933년)


슈트라우스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그가 토스카니니를 대신할만한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이길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잡한 음악성과 한결같지 않은 발전에 관심이 있는 우리는 <파르지팔> 연주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찾아냈다. 카를 무크가 같은 작품을 1930년에 지휘했을 때,  그의 해석은 느리다고 대다수의 비난을 받았다. 이듬해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맡았는데, 완벽하다고 칭송받은 1막의 시간이 기록되었고, 무크의 연주보다 20분 가량 느렸다[각주:6]. 시계를 보니, 슈트라우스는 무크보다 몇 분 느리게 지휘했으며, 그는 오케스트라에게 그가 느리게 지휘하기에는 20년은 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의 1막은, 몇몇 예외가 있었지만,  따분했던 것이다. 구르네만츠와, 파르지팔, 성배, 성금요일의 음악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걸로 보였다.


쿤드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슈트라우스는 음악을 가슴으로 좇았는데, 그는 날카로운 프레이즈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았지만, 1막의 남은 장면은 슈트라우스에게 생소한 영혼의 세계였던 것이다. 2막은 그의 성미에 더 맞았다; 그는 클링조어-쿤드리 장면을 이해했고, 꽃처녀 장면의 음악에 관능성을 부여했는데, 이는 꽃쳐녀들을 어깨부터 발목까지 뒤덮은 안어울리게 수수한 의상과 이상하게 대비되었다. 막의 남은 부분에서 그의 공감은 명백하게 쿤드리를 향했다; 그러나 그의 빠른 템포는 쿤드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조롱했는지 파르지팔에게 말하는 굉장히 극적인 악절을 망쳤다.


(에밀 프레토리우스의 1936년 파르지팔 3막 무대)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들에는 이상할 정도로 빛을 내는 작품성이 있는데, 마치 창의적 지성이 이미 죽음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이 세계에서 경험한 정서와는 비교가 안되게 위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는 <폭풍우[각주:7]>와 <마술피리>,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 볼프의 <미켈란젤로 가곡>,  그리고 파르지팔의 마지막 막에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막의 신비주의는 슈트라우스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미국 관광객이 미술관에서 신기록을 ‘세우는’ 것 처럼 주파했는데, 모든 것을 훓었고, 관람했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첨언: 특집으로 쓴 기사인가보다. 유튜브나 오페라패션에 돌아다니는 33년 파르지팔 실황은 페이크란 이야기도 있으니... 적당히 감안하고 듣는게 좋겠다.


슈트라우스의 경우 1933년 바이로이트 이전까지 파르지팔을 단 4차례 지휘했다고 한다. 적다면 적은 기록이지만, 20세기가 막 시작했던 그 시절 파르지팔 공연이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생각하면 적다고 볼 수는 없는 횟수 아닐까.


당시 평은 대체로 빠른 템포를 지적했는데, 유명 평론가 어니스트 뉴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슈트라우스 지휘가 그런 감이 있지만, 슈트라우스가 1933년 리허설 중에 했다는 말은 퍽 인상적이다.


"마이스터께서 이미 파르지팔을 아주 느린 음악으로 작곡했으니, 여기다 더해서 더 느리게 지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프레토리우스 무대 참 좋다.



  1. August 1933. The Bayreuth Festival "Featuring Herr Hitler" [본문으로]
  2. 바그너의 자서전 [본문으로]
  3. 탄호이저 카페는 검색이 안되는데 라인골트 호텔은 아직도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4. 음악이 곁들여진 시사 풍자극. [본문으로]
  5. 원문에는 Zeitschrift für Musik. [본문으로]
  6. 토스카니니가 파르지팔 1막을 상당히 느리게 지휘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본문으로]
  7.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