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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기타

에밀 길렐스 모스크바 실황 Vol.4 (1977년 슈만, 브람스, 쇼팽 VAI)

by Chaillyboy 2016. 8. 10.


로베르트 슈만: 스케르초, 지그, 로만체와 푸게타 (네 개의 피아노 소품) Op.32 (1838-1839)

요하네스 브람스: 네 개의 발라드 Op.10 (1854)

프레데리크 쇼팽: 폴로네이즈 Op.40, No.2 (1838)

프레데리크 쇼팽: 피아노 소나타 제3번 Op.58 (1844)

프레데리크 쇼팽: 내림 가 장조 연습곡 Op. Posth. (1839)

프레데리크 쇼팽: 폴로네이즈 Op.53 "영웅" (1842)


피아노: 에밀 길렐스


1977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음악원 대강당, 모스크바


VAI 4469




* DVD 커버와 (있으나 마나 한) 내지에 표시된 1978 년과 다르게, 많은 디스코그래피와 비디오그래피는 리사이틀의 연도를 1977년 12월 27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피아니즘이란 단어에서, 지구력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보여주는 마라톤 연주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음이 멎을 때까지 매 순간 진지함과 강렬함이 살아있죠. 불길에 얼굴을 가까이 댄 것처럼, 음향이 사라져도 청중은 피아니스트가 짠 무한한 감성 구조물에 붙잡힙니다. 그들의 연주는 퍼포먼스라기보단 이런 구조물을 경험하는 의미가 커 보입니다.


강렬함은 특유의 초절기교와 연마된 음색으로 이루어지고, 진지함은 곡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에서 비롯되는데, 에밀 길렐스야 말로 이런 범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혹은, 에밀 길렐스가 러시아 피아니즘의 표준이 되면서 이런 일반론이 나중에 생겼겠죠.


특이하게도 길렐스에서 지구력은 여러 층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모든 연주가 보여주는 특유의 무덤덤한 집중력이 먼저 떠오르지만, 넓게 보면 이 사람의 인생 전체가 커다란 지구력이기 때문입니다.이는 나탄 밀스타인이 바이올린에서 보여준 위대한 업적과 비교할 수 있는데, 시간의 흐름이 밀스타인의 기량을 - 그리고 담금질을 거친 독특한 은빛 음향을 - 떨어트릴 수 없었듯이, 길렐스 역시 나이가 들며 흔히 보이는 피아니즘의 쇠퇴 (혹은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경쟁자이자 소비에트의 위대한 예술 동료로서 시공간을 같이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는 다른 점이죠. 좋게 말해 리히테르가 1950년대 극한의 해석을 실현하고 이후 시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면, 길렐스는 상대적으로 일관적으로 기량과 해석의 틀을 유지했습니다. 아폴론적이라고 흔히 말하는 음색 역시 마찬가지죠. 여기 VAI에서 발매된 실황에서도 단단하게 뭉치는 저음과 사방으로 퍼지며 샴페인처럼 귀를 울리는 고음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런 음색은 브람스의 초기 걸작인 발라드에서 청중을 시작부터 그대로 강타합니다. 곡을 들이대는 첫 화음과 이어지는 프레이즈에서 종소리처럼 저음이 울리며 동시에 오른손은 가볍지 않게 멜로디를 보여주는데, 앞으로 브람스가 그의 작품에서 꾸준하게 강조할 엄숙함과 찬란함의 병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연주 전체가 도취적이지 않고, 음의 골격은 강건합니다. 하지만, 연주가 건조하지는 않습니다. 발라드의 두 번째 곡이나, 슈만 소품 중 로만체의 서정적인 흥얼거림이 그렇죠. 길렐스가 에트빈 피셔의 음색과 발터 기제킹의 페달링 없이 노래하는 타건을 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종종 앞머리를 뒤로 넘길 때 빼고는, 동작 역시 간결하며 효과적입니다. 겐리흐 네이가우스 문하의 피아니스트들이 흔히 그랬듯이, 몸통을 사용해서 타건의 명료함을 만들어내는데, 리히테르가 몸 전체를 반복적으로 강렬하게 긴장, 이완시키며 순간순간 극한의 타건을 들려주는 것과 다르게, 길렐스는 무게를 싣거나 등을 종종 뒤로 빼지만, 지극히 냉정하고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곡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를 등에 업은 이런 음향 컨트롤은 청중에게 정말 효과적으로 다가옵니다.


쇼팽의 경우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습니다. 영웅 폴로네이즈는 관심 없는 곡이라 그냥 들었습니다만, 피아노 소나타 3번은 흥미로웠습니다. 이전까지 2번 소나타보다 애정이 안 가던 곡이었지만, 이 연주를 듣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복잡하게 얽힌 1악장에서 긴장감을 쌓으며 몰입을 돕는 해석. 무표정하다는 편견과 다르게, 전개부의 서정은 길렐스의 음색과 절묘하게 섞입니다. 재현부로 넘어가는 극적인 표정변화는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론 이 부분에 놀라 곡을 다시 돌려 들었습니다. 3악장과 4악장의 대비 역시 인상적이에요. 그 대비를 하나로 묶은 긴장감에 더욱 놀랐고요. 물론 절제된 서정성에 숨어있는 이런 강철같은 긴장감이 쇼팽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치가 종종 있습니다만,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VAI에서 길렐스 모스크바 실황을 여러 종의 DVD로 발매했지만, 굳이 사서 볼까 싶긴 합니다. DVD 품질이 조악하고, 이미 유튜브에 여러 업로더가 실황 전체를 올리기도 했거든요. 저부터 빌려서 봤으니... 그래도 일단은 정식으로 판권을 계약하는 회사 같으니, 기회가 되는데로 관심 생기는 영상을 구매해볼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