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1889)
산투차: 타티아나 트로야노스
투리두: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 진 크래프트
알피오: 번 시날
롤라: 아이솔라 존스
루제로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1892)
토니오: 셰릴 밀른스
카니오: 플라시도 도밍고
넷다: 테레사 스트레타스
실비오: 알란 몽크
제임스 레바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연출과 무대, 의상 디자인: 프랑코 제피렐리
촬영: 커크 브라우닝
1978년 4월 5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링컨 센터, 뉴욕
SONY 88697910089
의외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이하 메트)는 기술 변화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극장입니다. 다만 잘 알려진 대로 그런 감각을 연출에는 제대로 접목하지 못하죠. 굳이 말하자면 돈 냄새가 나는 쪽으로 기가 막힌 기술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메트는 야심에 찬 발명가 리 드 포레스트의 기획으로 세계 최초의 공영 라디오 방송을 선보입니다. 엔리오 카루소가 주연을 맡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팔리아치> (이하 카브/팔리)였는데, 이게 무려 1910년 1월입니다. 당연히 망했다는 걸 예상할 수 있죠. 하지만, 결론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시장을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봤는지 알 수 있는 상당히 무서운 대목이죠. (참고로, 지금까지도 오래된 실황 음원에 대한 메트의 저작권료는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사건이 주는 또 하나의 결론은 이겁니다. 카브/팔리가 그 만큼 잘 팔리는 오페라라는 것. 그리고 메트에서 이 레퍼토리는 절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 물론 메트가 보수적으로 고른 레퍼토리에서 빠질 수 있는 오페라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테면, 라우리츠 멜히오르나 에리히 라인스도로프가 없었다면 메트에서 바그너는 지금과 같은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카브/팔리는 메트가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극장의 중심이 된 것 같습니다. 짧은 곡을 극장에 올리기 위해 다른 오페라의 막 - 예컨대 <라 트라비아타>의 1막 - 을 가져와서라도 매년 올렸으니까요.
메트는 소니와 손을 잡고 자신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발매합니다. 그 정점에서 <바그너 앳 더 메트>, <베르디 앳 더 메트>라는 실황 음원 발매사에 길이 남을 박스를 발매하기도 했죠. 그 이후론 의미있는 발매가 없습니다만 - <도밍고 앳 더 메트>라는 소품에 가까운 박스가 있지만,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요? - , 그들이 21세기에 발매한 양은 상당합니다. 1여기 소개하는 카브/팔리의 1978년 실황 영상물도 그런 흐름의 일부죠.
아주 메트적인 내용물입니다. 화려한 무대에 쏟아지는 박수, 간주곡이 끝나고 기어코 나오는 박수, 극을 시작하는 토니오의 'Si può?'가 끝나자마자 가수를 부르는 박수 - 도대체 여기서 왜 커튼콜을 합니까 -, 그렇게 끊어지는 연결성과 감흥. 메트가 사랑한 가수, 그리고 제임스 레바인. 이런 분위기는 득보단 실이 많습니다.
물론 관객과 다르게 레바인은 극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팔리아치>를 정말 잘 이끌고 나가더군요. 어디서 해석이 툭 튀어나왔는지 처음에는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자연스럽게 몰입했고 어느새 극이 끝난 겁니다. 무던한 해석, 재미없는 지휘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비교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균형감을 지키며, 신파와 절제를 모두 거부할 줄 아는 훌륭한 지휘였습니다. 자연스러운 템포도 그런 중용에 한몫했죠.
하지만 저에게 레바인은, 푸치니를 비롯한 후기 이탈리아 오페라보단, 베르디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리듬의 골격과 형식적 대비를 이용해서 서서히 긴장감을 쌓을 줄 알고, 그걸 적재적소에서 원하는 세기로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이죠. 오케스트라의 조련 - 혹은 메트가 고질적인 드러내는 형편없는 반주력 - 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 사람은 오케스트라에 따라서 음색이 바뀌죠. 이 연주 역시 그런 한계를 모두 보였는데,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리허설 부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케스트라의 합주력이 수준 이하입니다. 앙상블의 난조를 떠나서 집중력이 시종일관 떨어져요. <팔리아치>에서는 놀랄만한 간주곡 연주를 보여주는데, 저는 오히려 이 사람들이 '중요' 부분만 연습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메트의 살인적인 일정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죠.
프랑코 제피렐리는 21세기에 저평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출가입니다. 이 사람의 시도는 눈요기라는 비판을 받죠. 저는 무대에 당나귀나 끌고 올 줄 아는 연출가라는 비아냥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악의적이지만 어느 정도 정곡을 짚은 비판이죠. 오페라를 보면 제피렐리를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만, 기억에 남는 건 메트박수, 즉 화려한 무대, 그리고 거기서 뛰어다니는 꼬마들입니다. 가끔은 리브레토를 사무적으로 옮기며 생기는 극의 부족한 구성을 뛰어다니는 꼬마로 메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팔리아치>가 그랬거든요. 그리고 <팔리아치>의 극 중 극에선 식탁이 몸개그를 하는데, 제피렐리가 자연스러움, 즉 '그것이 있어야 할 그곳'을 성취하는 탁월함이 있다면, 이런 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답을 찾지 못했는데... 혹시 보시거든 해석을 댓글로 공유해주셔요.
그래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훌륭합니다. (사실 이탈리아인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헤매면 안 되죠) 산투차는 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죠. 제피렐리는 부활절에 구원받는 그를 명백하게 성모 마리아에 은유합니다. 저는 이 오페라의 플롯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산투차를 중심으로 극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지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연출은 꽤나 섬세한 데, 예컨대 극의 초반 알피오와 말하는 산투차가 부끄러움을 느끼며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또한 선배 연출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음악과 연출이 한 몸처럼 진행되고, 연기 지도는 탁월합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극을 이끌 임무가 막중한 산투차 - 타티아나 트로야노스 - 는 표정과 몸짓, 움직임, 음성, 대사 모든 게 연출과 한몸이었습니다.
한편 무대는 예배당을 높이 세워 인물이 수평과 수직축 모두를 오갈 수 있게 짜여있습니다. 뻔한 기본기겠지만, 극 진행에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제피렐리가 <라 보엠>에서도 그랬듯이 (확실하지 않네요.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극장의 깊이를 이용하지 않는 건 여전히 아쉽습니다. 클로즈업의 한계지만, 골판지처럼 보이는 2D 배경은 21세기 연출에 익숙한 우리에겐 아주 허술한 채움이죠. (제피렐리보다 비슷한 업계의 오토 솅크-귄터 슈나이더 짐센을 더 선호하는 이유입니다.)
카브/팔리를 하나로 묶으면서 테너는 자연스럽게 공연의 타이틀 롤이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테너와 다르게, 많은 극장에서 산투차/넷다, 알피오/토니오는 다른 성악가가 부르곤 합니다. 물론 음역의 문제도 있지만요. 하지만, 투리두/카니오 역시 접근방식이 - 전혀 - 다른 배역입니다. 두 역할을 같은 테너가 맡아야 하는 음악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두 곡 모두에 완벽한 테너를 찾는 게, 혹은 한 곡이라도 성악적 탁월함과 배역의 성격을 모두 성취한 테너를 찾는 게 - 요약하자면, 결정반을 찾기 - 너무 힘들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마리오 델 모나코는 완벽한 카니오일겁니다. 하지만, 한에 사무친 발작보다는 그냥 미친놈에 가깝죠. 게다가 이 가수의 투리두는 너무 어색합니다. 코렐리의 투리두는 완벽한 퍼포먼스지만, 여전히 그의 영웅적인 목소리가 흔한 - 시칠리아 방언을 쓰는 - 촌뜨기 불륜남과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코렐리의 카니오는 델 모나코의 투리두보다 더 이상해 보입니다. 차라리 주세페 디 스테파노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 저는 유명한 세라핀 지휘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정규반이 그나마 취향에 맞더군요 - , 그의 카니오는 끓어오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구원투수로 기대했던 존 비커스는 목소리가 너무 무겁고 낮게 깔립니다. 그의 카니오는 이론상 완벽한 조합이었지만 전혀 감흥이 오지 않았습니다. 베냐미노 질리는 뭘 해도 질리처럼 불러서 결정반을 만들죠. 이건 치트키 같아서 뺐습니다.
차라리 카를로 베르곤지가 그를 최상으로 끌어낼 위대한 지휘자와 공연했다면 두 오페라 모두의 결정반을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만... 아쉬운 일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에서 (그를 반주한) 카라얀보다 더 적절한 지휘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카라얀은 유미주의자였죠.
플라시도 도밍고에게 눈길이 간 이유입니다. 저는 도밍고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 때문입니다. 비좁은 병목을 보는듯한 그의 음색은 영웅적인 배역에 전혀 안 어울려요; 극단적인 예가 <오텔로>일텐데, 하지만 음역과 음성 자체는 드라마틱/헬덴 테너에 가깝단 게 문제죠. 그래서 그가 장기로 삼은 대부분의 역할이 제겐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볼프강 빈트가센같은 위대한 가수도 제겐 얼추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현명함이 있었죠. 반면에 도밍고는 레퍼토리만 들입다 늘렸잖아요? 심지어 지금은 바리톤으로 배역을 바꿔 부르며 의학적인 불가사의를 뽐내고 있으니.
이쯤 되면 왜 도밍고의 카브/팔리를 기대했는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론만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우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선 그의 장점인 배역 몰입과 연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감정 없이 - 예컨대 'Santuzza, credimi' 이하 절정 부분을 - 부르는 탑 클래스 가수는 처음 봅니다. 제가 기대한 바는 'Mamma, quel vino è generoso'에 가서 겨우 살아납니다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그 곳은 기승전-결결에 가까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극장에서 이런 해석을 들었다면, 마지막에 박수를 챙기려고 힘을 아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팔리아치>는 훨씬 나았습니다만, 하지만, 도밍고의 음색이 카니오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밍고로서는 아쉬운 일이네요.
번 시날의 알피오는 딕션에 문제가 있었고, 메트의 자존심 셰릴 밀른스는 목소리가 너무 깔끔합니다. 거구의 바리톤이 성큼성큼 걸어와 피를 토하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설득력 있겠지만요. 트로야노스는 앞서 짧게 극찬했죠. 피오렌차 코소토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찰흙 같은 음성은 아니지만, 'Inneggiamo, il Signor non morto'-부활절 의례-'Voi lo sapete, o mamma'로 이어지는 극의 핵심을 절묘하게 꿰뚫었습니다. 가련하고 억압받으며 동시에 죄의식을 느끼는 시골여인의 심리를 그가 제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뿜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모차르트가 사랑스러운 테레사 스트레타스의 넷다는 시체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여전히 도밍고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네요. 이건 예상이 틀린 것에 대한 방어심리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결국 1976년 일본 실황을 쳐다보게 됩니다. 게다가 이건 코소토의 산투차 아닙니까. 카라얀과 보여준 두 사람의 앙상블이 정말 뛰어났기 때문에 더 기대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싶네요.
- 물론, 메트는 LP 시절부터 후원자나 애호가를 대상으로 황금시대의 실황을 제한적으로 배포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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