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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기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팔리아치 (2015년 잘츠부르크 부활절축제 SONY)

by Chaillyboy 2016. 7. 28.



피에트로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1889)

산투차: 류드밀라 모나스트리스카

투리두: 요나스 카우프만

루치아: 스테파니아 토치스카

알피오: 암브로조 마에스트리

롤라: 아날리사 스트로파


루제로 레온카발로: 팔리아치 (1892)

넷다: 마리아 아그레스타

카니오: 요나스 카우프만

토니오: 디미트리 플라타니아스

벱페: 탄젤 아크지벡 

실비오: 알레시오 아르두이니


크리스티안 틸레만,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작센 주립 오페라 합창단, 잘츠부르크 바흐 합창단, 잘츠부르크 축제 소년 합창단 

연출과 무대 디자인: 필립 슈퇼츨

촬영: 브라이언 라지


2015년 3월 26일 - 4월 6일,  대축제극장,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를 둘러싼 카라얀 家와 틸레만, 베를린필의 알력 다툼은 결국 카라얀 와 틸레만의 동행으로 끝났습니다. 그 노골적인 결과가 카라얀의 1967년 발퀴레 프로덕션을 '재창조'한다는 내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계획이 아닐까요? 모든 면에서 틸레만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한 축제를 독점하고 매년 한 편의 오페라를 올리는건 애호가 입장에선 괜찮은 일입니다. 전권을 가지고 일회적인 결과물을 보여주기에 예술가의 극단적인 프로필이 되기 때문이죠.

 

소니에서 2015년 부활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팔리아치> (이하 카브/팔리) 실황을 발매했습니다. 틸레만은 종종 세간의 편견을 비웃는 능청스러운 레퍼토리를 올리곤 하죠. 하지만 의도가 어쨌든, 어울리지 않는 레퍼토리에서 예술가는 비교적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압도하는 틸레만'이라는 이미지를 만든 (텔레그레프는 이 연주를 논평하며 틸레만을 'uber-conductor' 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명백한 비아냥입니다) 독일 레퍼토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 가는 캐스팅이라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틸레만이 전면에 드러나는 일은 잘 없습니다. 충실하게 가수를 반주하는 편이죠. 전매특허의 해석은 물론 여전합니다. 항상 '변태적'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클라이막스의 안티-클라이막스화. 완만하지만 거대한 능선을 만들고 마는 크레셴도.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가속. 베리스모를 어떤 방식으로 고민해도 이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단문으로 끊어치는 자연주의 소설을 만연체로 낭독하는 느낌일까요? (데 사바타와 칸텔리,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양손에 쥔 지휘자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반주가 괜찮은 건 잔뼈가 굵은 그의 극장 경력 때문일 겁니다. 틸레만은 인물들의 심리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라갑니다. <팔리아치>가 끝나며 카니오는 "La Commedia è finita!"를 읊조립니다. 틸레만은 pp로 팀파니를 제어하며 긴장을 길게 늘리다가 순식간에 폭발시켜 살인자의 분열적인 심리를 표현하죠.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해석입니다[각주:1]. 현악과 금관을 절묘하게 섞어 신파적으로 온도를 높이는 이탈리아 극장 지휘자들에 비해 틸레만은 오히려 절제된 느낌까지 드는데, "Mamma, quel vino è generoso"에 깔리는 반주가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엔 1930년대가 전성기였음에도 지금까지 처연하게 빛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연주도 한몫합니다. 카라얀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탄했던 은빛 소리가 잘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투명하고 균일한 현악은 가수를 정교하게 반주합니다.



시선을 끄는 건 연출입니다. 산악영화 <Nordwand>로 유명한 필립 슈퇼츨이 감독했죠. 연출의 방향을 무성영화, 혹은 반대로 그것과 경쟁하며 사라진 베리스모에 대한 오마주라고 생각하는 기사가 많았습니다. 아마 여섯 개로 나눈 무대 한 면에 클로즈업한 가수를 종종 영사했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여기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대를 채운 영상에선 무성영화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냥 클로즈업이죠. 그렇다고 플롯에 영화를 떠올리는 장치가 추가되지도 않았습니다. 슈퇼츨은 2007년 잘츠부르크에서 연출한 <벤베누토 첼리니>에선 대놓고 프리츠 랑과 배트맨을 오마주합니다. 특정 시대의 영화를 영화감독이 의도했다면 훨씬 더 정교하게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는 무대도 영화가 소재라는 해석을 뒷받침했습니다. 심지어 독일 영화감독이니 말입니다. 텔레그레프에서는 구체적으로 라이오넬 파이닝거를 언급했죠. 하지만 저는 무대에서 오히려 만화를 느꼈습니다. 이건 감독의 다른 연출에서도 모두 느껴지는 감각입니다. 사실 만화도 19세기 말 발전한 매체가 아닙니까? 베리스모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동시대 모든 예술에 - 홉스봄은 이를 사진이란 키워드로 한 칼에 설명하기도 합니다 - 녹아있습니다. 만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덧붙이자면 파이닝거는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죠.


연출과 무대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재적입니다. 누구도 너비가 백 미터가 넘는 잘츠부르크 대극장에서 이렇게 꽉 찬 느낌의 (심지어) 베리스모를 연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연출이 <보리스 고두노프>나 <돈 카를로>에 최적화된 극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한 감독의 천재성과 불가피한 결론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관객의 시선이 분산될 여지가 있지만, 이는 앞서 말한 클로즈업 등으로 보완되었습니다. 여섯 개의 커트에서 독립적인 듯 연결되는 장면은 베리스모의 정수 - 바닥에 착 깔려 부유하는 삶 - 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카브/팔리는 흑백과 환각적인 형광으로 대비되었습니다. 이건 두 오페라의 다름을 나타내는 탁월한 선택입니다. 우선 이탈리아 자연주의/성공에 목마른 작(곡)가가 쓴 현란한 장치는 확실히 비교됩니다. 또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제의'에 밀착한 일상을 그린 - 그래서 가장 이탈리아적인 - 오페라입니다. 착 가라앉은 단색만큼 어울리는 색채가 있을까요. 이에 비해 <팔리아치>는 치정이란 소재를 빼면 오히려 탈 지역적이죠. 눈을 한곳에 둘 수 없는 오색 형광이 어울리는 이유일 겁니다.


다른 시도가 주목받진 않았습니다. 강력한 틀을 만든 뒤 그 흐름을 그대로 따라갔다 할까요? 투리두와 산투차에게 아들이 있다는 설정이나, 마피아로 설정된 알피오 역시 보조적인 장치에 불과합니다. 다만 <팔리아치>의 시작에서 등장인물이 벌이는 메타적인 향연은 개인적으로 취향 저격이라... 팔리아치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설정이었습니다. 


요나스 카우프만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공연이었죠. 카우프만의 음성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하지만, 순식간에 불이 붙는 특유의 음색과 연기는 - 항상 이 테너에게 떠오르는 말은 화기엄금입니다 - 이 역할에 잘 어울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카브/팔리에 어울리는 테너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는데 카우프만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이외에도 산투차를 연기한 류드밀라 모나스트리카는 눈에서 레이저를 뿜는 재주가 있었죠. 평면적이지만 용광로에 온 몸을 던지는 듯한 연기과 노래는 정말 멋졌습니다. 알피오는 <팔스타프>로 유명한 암브로조 마에스트리가 연기했는데, <팔스타프>나 <리골레토>를 아쉽게 한 깔끔하고 점잖은 음색은 여전했습니다. 다만, 분장을 어떻게 시켰는지 완벽한 마피아로 보이더군요. 인상적이었습니다. <팔리아치>의 가수들은 특징 없이 무던한 편입니다.


소니의 블루레이는 지갑에 부담이 적어서 항상 좋습니다만. 가격을 조금 올려도 좋으니 약간의 부가 영상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여담이지만 소니는 저가 정책의 일환인지 자사 블루레이를 전혀 홍보하지 않더군요. 공식 트레일러가 없을 때도 많은데 - 토마스 헹겔브록이 지휘한 <돈 조반니>는 어떤 홍보도 없이 결국 소리소문없이 지나갔죠 - , 위에 올린 국내 영화관 홍보 영상을 한 해외 쇼핑몰에서 트레일러로 쓰는 걸 보고 잠깐 피식했어요. 그래도 살 사람은 산다는 생각일 겁니다.

  1. 여담이지만 샤이와 호세 쿠라는 대사를 발작적으로 지르고 바로 관현악을 폭발시키는 정 반대의 해석을 보이죠. 역시 효과적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