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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기타

파르지팔 (2016년 바이로이트 축제 BR)

by Chaillyboy 2016. 8. 16.

  

리하르트 바그너: 파르지팔 (1882)

구르네만츠: 게오르크 제펜펠트

파르지팔: 클라우스 플로리안 포크트

쿤드리: 엘레나 판크라토바

암포르타스: 라이언 맥키니 

클링조르: 게르트 그로초프스키

티투렐: 칼-하인츠 레너


하르트무트 헨셴,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연출: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

무대 디자인: 기스베르트 예켈

의상 디자인: 예시카 카르게 

비디오: 제라르 나지리


2016년 7월 25일, 축제극장, 바이로이트


전곡 감상: https://www.br-klassik.de/concert/ausstrahlung-775304.html 

(언제 잘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S), 혹은 다에시라 불리는 무장 테러 단체가 이라크와 그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수십만명의 난민이 유럽을 향했고 그중 적지 않은 수가 사망했습니다. 모술 북쪽에 위치한 탈카이프 (혹은 텔 케페)라는 소도시에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지파인 칼데아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결국 그들 모두 쿠르드 자치구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여전히 이 도시에는 수니파 무슬림과 ISIS 테러리스트만 남아있는 상황이죠.


올해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막작은 파르지팔입니다. 슈테판 헤어하임의 기적적인 프로덕션이 2012년 끝나며 새로운 프로덕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커졌죠. 요나탄 메세라는 젊은 미술 작가가 연출을 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임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과도한 예산이 해고 사유였지만, 연출경력이 전혀 없는 작가에 대한 불신이 불을 지피다가 나치 경례가 포함된 작품[각주:1]에 대한 논란이 결국 그를 잘랐다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그렇게 비스바덴의 극장장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가 대타로 연출을 맡게 되죠.

   

라우펜베르크는 탈카이프에 자리한 가상의 가톨릭 성전에서 극을 출발합니다. 이슬람을 모욕하는 연출(Islamkritik)이라는 소문이 돌며 논란이 새롭게 커졌는데, 결국 소총을 찬 무장 경찰이 배치되고, 매년 메르켈이 입장하던 레드 카펫 행사가 취소됩니다. 무대 의상 - 국방색의 군복 - 을 입고 근처를 돌아다니던 파르지팔 역의 클라우스 플로리안 포크트가 경찰에 붙잡히며 해프닝은 정점에 달하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이슬람을 모욕하는 연출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라우펜베르크는 파르지팔의 원전을 강조합니다. 자기 생각보다는 대본과 악보에서 드러나는 의도를 인터뷰에서 종종 말하는 데, 연출이 어떻게 흘러갈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시가 무대일 텐데, 1882년 초연 무대와 너무 닮았죠. 보통 가톨릭 성전의 이미지는 비슷하게 정해져 있긴 해도, 이 정도면 사실상 오마주 아닙니까?


 

연출이 참 고증을 잘합니다. 자연주의 시대가 나치와 엮인 이후 바이로이트에서 이건 흔치 않은 일이죠. 꽃의 처녀가 부르카를 쓴 에로틱한 여성인 게 논란을 불렀지만, 이건 신화를 그들의 역사로 환원시키면 나오는 결과 아닌가요? 게다가 몬살바트는 스페인에 있잖아요. 서양인이 이슬람에서 하렘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 또한, 왜곡된 - 시각이죠. 다른 장면도 그렇습니다. 꽃이 만개하고 파르지팔이 노래하는 3막에서 꽃의 처녀가 나타나는 건, - 뒤에서 까겠지만 - 어쨌든 음악/대본에 어긋나지 않아 보입니다. 포로 암포르타스가 묵역으로 등장하는 2막 역시 마찬가지죠. 십자가 딜도(이 표현밖에 생각 안나네요)를 들이대며 클링조르가 쿤드리의 과거를 추궁하는 장면 역시 그렇습니다. 오히려 보수적인 시도죠. 피날레에서 모든 인물은 안갯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데, 화합으로 끝나는 것보다 설득력 있습니다. 라우펜베르크는 피날레에서 음악이 무(無)를 향한다고 말합니다. 불교 세계관을 생각해 본다면 지당하신 말씀이죠.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연출은 동시대를 향합니다. 저는 이 연출이 2016년에 반드시 나와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파르지팔은 지금의 문제를 너무 직접적으로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플롯은 이렇습니다. 탈카이프의 성전에는 군인과 피란민이 모여드는데, 여긴 성배 기사단이 의식을 행했던 곳입니다. 암포르타스는 왕보단 채찍 고행자, 희생자에 가깝고, 1막의 시점에는 무기력한 폐인에 불과합니다. 기사단은 (장면 전환으로 돌아간) 먼 과거에는 티투렐의 주도 아래 암포르타스의 피를 성찬 하는 의식을 벌이기도 합니다. 파르지팔은 에이란 쿠르디처럼 보이는 꼬마를 백조와 함께 죽이며 등장하고, 의식을 불쾌해할 뿐이죠.


2막의 성전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어 있고, 클링조르는 십자가를 수집하는 ISIS 지도자로 보입니다. 그는 암포르타스를 포로로 잡고 쿤드리를 이용해서 파르지팔을 유혹하지만 실패하고 무섭도록 자기를 벌하고, 파르지팔은 성창을 부러트려 십자가로 바꿔 그를 제압합니다. 암포르타스는 쿤드리를 범하지만 끝내 고통스러워할 뿐입니다.


3막의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파르지팔은 온갖 종교 상징물을 매단 성창으로 깨달음을 선언하고, 성전은 거대한 원시림으로 바뀝니다. 해방된 꽃의 처녀들은 떨어지는 빗물에 나체를 씻고, 자유로워집니다. 장면 전환 이후 기사단원과 여러 종교의 교인들이 암포르타스를 둘러싸고 의식을 강요하지만, 파르지팔이 나타나 성창을 관 속에 집어넣자, 그들은 모두 자기 종교의 상징물을 관 속에 같이 집어 던집니다. 그리고 안갯속으로 모두 사라지죠. 



 

시도는 좋았습니다. 1막을 볼 때는 뭔가 대단한 게 나오겠다 싶었죠. 파르지팔을 서방과 이슬람 문화권의 뿌리 깊은 갈등으로 치환시키고, 지금을 배경으로 갈등을 통찰하는 듯싶었습니다. 파르지팔의 등장장면이 그렇죠. 난민 어린이의 죽음은 갈등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단순한 서방세계의 책임이라는 듯이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기사단은 종교가 내재하는 광기를 충실하게 드러내죠, 그걸 보고 순진한 파르지팔은 그저 불쾌해합니다. 당연한 반응이죠. 거기서 파르지팔은 평범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그걸 모두 아우르는 시각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모두 까기 인형이 되던가요.


하지만 2막과 3막은 대본의 플롯을 어정쩡하게 재현하면서 애매하고, 진부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라우펜베르크는 파르지팔이 범 종교적인, 탈 종교적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종교 이후를 답한다. 도그마와 모든 종교를 - 피날레에선 유대교와 불교를 포함한 오만가지 종교 심벌이 관 속에 모두 처박힙니다 - 버리고 무로 돌아가자. 뻔하지만 수긍합니다. 하지만 그럴 거면 극의 시공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2016년에서 소재를 가져올 필요가 전혀 없죠. 


게다가 시도는 너무 진부합니다. 이슬람에서 해방된 처녀들은 알몸으로 원시림에서 몸을 씻습니다. 치유를 상징하는 클리셰인 대자연의 눈물 - 즉, 빗물 - 이 떨어지면서 말입니다. 아, 여기서 생각나는 루살카 그분... 전기톱 쓰는 드라마투르그 그분... 이건 더 언급하지 말죠. 


그런데 여기서 알몸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요? 선정성을 높이려는 (남성의) 시도입니다. 종교가 마찬가지로 억압해왔을 묵역 군인이나 기사단이 같이 벗으면 덜 짜증 나겠는데, 이건 그냥... 결국, 기억나는 건 퇴장하면서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가리려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기사단에 대한 설정은 상세했지만 결국 맥거핀이 되었습니다. 자기 시선으로 성배와 기사단을 구체화 시킨 건 좋았습니다만, 결론과 통합되지도 않고, 서사에 필수적이지 않았습니다. 3막의 물거품이 1막을 공허하게 만들어 버렸죠. 암포르타스와 군드리, 파르지팔 사이의 긴장감 역시 결국 용두사미가 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장면전환은 영상이 채웁니다. 무대 설치물에 영사되는 게 아닙니다. 막이 내려가고 풀 스크린으로 동영상이 재생돼요. 영상을 쓰는 게 싫진 않습니다. 다만 이건 허술했습니다. CG 수준은 은하철도999가 떠올랐는데 그건 관대하게 눈 감아 줍시다. 1막 장면전환은 작품의 시공간을 제시하는데, 성전을 수직 부감으로 찍으면서 건물 위로 상승하고, 태양계를 벗어났다가(!) 성간물질을 쓱 지나 다시 탈카이프로 돌아옵니다. 3막 장면 전환에선, 늙은 쿤드리와 암포르타스의 얼굴이 차례대로 안개의 흐름에 서서히 사라지고, 마지막엔 바그너의 데스마스크가 똑같이 사라집니다. 영욕의 바그너를 이젠 놓아주자는 깊은 뜻이 있었을까요?


외신의 반응은 엇갈렸는데, 시도가 키치적이라는 평이 공감 가더군요. 당위성이 있는 소재를 결심한 이상 그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좋은 소재를 어정쩡하게 만들었기에, 연출의 미덕까지 모두 키치로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악의적인 기사만 골라 배포하는 노먼 레브레히트의 코멘트가 한글로 재배포되면서 전혀 볼 가치가 없는 프로덕션처럼 한국에선 회자가 되었습니다. 이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편견과 다르게 연출가 커튼콜에서 쏟아진 야유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연출가라면 바이로이트 야유가 적다고 자랑스러워 하진 않을 겁니다.


 

내정된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음악 감독 크리스티안 틸레만과의 불화로 바이로이트를 떠났고 - 틸레만이 객석에 앉아 '진짜배기 바그너는 이렇다'는 훈장질을 했을 거라는 비아냥이 쏟아졌죠 - , 노련한 극장 지휘자 하르트무트 헨셴이 구원투수로 등판했습니다. 이 용병술은 성공으로 드러났습니다. 헨셴은 명료함을 중시하며, 동시에 극의 서사를 극한까지 보조하는 데 성공했고, 초월/종교적인 크나퍼츠부슈형 드라마를 인간적인 역사극으로 바꿨죠. 특히 인물들의 레치타티보를 반주하며 모티프나 가끔 넣는 독백에서도 긴장감이 살아나더군요. 1막의 오케스트라는 투명함 대신 무게를 잃고 음향적 쾌감을 주지 못했지만, 2-3막에서는 제대로 된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합니다.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영리한 반주가 떠오르네요. 여담이지만, 헨셴은 바그너의 자필보를 사용했고 직접 교정한 파트보를 나눠주면서 처음부터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파트보가 전해져 내려오는 바이로이트에서, 악보를 외우다시피 한 단원들에게 큰 변화를 줬고, 그게 결국 제대로 먹혀들어간 셈입니다.


성악진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박수에서 알 수 있듯이, 구르네만츠를 맡은 게오르크 제펜펠트의 음성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베버나 호터 - 혹은 연광철 - 같은 기존 구르네만츠보단 상대적으로 음역이 높았는데, 연출 때문에 병풍처럼 보였을 구르네만츠에 제대로 존재감을 집어넣네요. 묵직함을 살리며 동시에 모든 음고를 꽉 채우는 목소리였는데, 다채로운 음색 변화를 통해 목소리 연기를 합니다. 이 가수의 보탄이 기대되는 순간이죠. 반대로 암포르타스를 부른 라이언 맥키니는 음역이 낮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음성과, 피셔 디스카우를 떠올리는 콧소리가 그닥 인상적이진 않았네요. 고뇌하는 왕보단, 육체와 정신 모두 고갈된 폐인의 음성으로 어울리기는 했습니다. 쿤드리는 러시아 소프라노 엘레나 판크라토바가 불렀죠. 1막의 끈적끈적한 음성을 듣고 순간 기대했지만 의외로 흡입력은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2-3막에서 드문드문 내지르는 폭발적인 음성으로 사람을 휘어잡더군요. 무난했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클링조르는 단조롭고 감정 없이 노래해서, 전혀 악한 같지 않았습니다. 연출상 암포르타스와 쌍으로 묶이는 클링조르를 생각하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논란은 포크트의 파르지팔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각성 전후의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시종일관 맑고 분명한 음색을 고집한 이런 해석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일말의 떨림 없는 순도 높은 그의 음성에서 신성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건 차라리 천진난만함에 가까운 목소리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상징적인 다른 연출에서 더욱 빛을 발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그로서는 나름 아쉬운 순간이겠습니다.

  1. 일베 논란 조형물에 대한 진중권의 옹호에서도 등장했던 작품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