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잡설/공연 후기

파우스트의 겁벌 (2016년 8월 19일 경기필하모닉)

by Chaillyboy 2016. 8. 20.

  

엑토르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Op.24 (1845)

파우스트: 강요셉

메피스토펠레: 사무엘 윤

마르게리트: 베셀리나 카사로바

브란더: 최인식


에밀 타바코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시합창단


2016년 8월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특별시


* 오페라 콘체르탄테, 프랑스어 가사 미제공, 1999년 한국초연.


  

한 가지 고백하고 시작하죠. 베를리오즈에 큰 애정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겠네요. 레퍼토리 확장에 게을렀습니다. 변명하자면, 확 눈을 끄는 매력이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벨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요. 집이나 감상실에선 연주회의 청중처럼 자연스럽게 집중하기 쉽지 않죠. 저는 베를리오즈의 음악 어법을 집에선 익히지 못했습니다. 분명 어제 오후만 해도 지리멸렬한 드라마, 어색한 관현악, 설익은 어법 같은 표현을 계속 반복했으니까요. 지금 보니 사실상 망발...


서양 관현악단과 관현악법의 완성을 - 에드워드 사이드 식으로 표현하자면 - 박물관에서 보는 현대인에게 베를리오즈는 분명 특이한 음악입니다. 특히 베버-베토벤-브람스-바그너-슈트라우스에 익숙한 대다수 청자라면 말입니다. 설사 드뷔시나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를 꾸준히 들었어도, 우리는 표준 관현악법을 독일-오스트리아로 잡곤 합니다. 이건 소비자를 아주 편하게 만들지만, 결론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오류죠. 해롭습니다. 19세기에 약동했던 다양한 시도와 그 본질을 느끼지 못하고, 중심을 제외한 나머지를 변칙과 일탈로서 바라보게 하니까요. 결국 (저를 포함한) 청자 입장에서도 그건 손해입니다. 20세기 음악의 주류를 신 빈악파 - 12음 기법 - 다름슈타트 아방가르드로 설정하면 그 대기의 풍성함을 느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제 생각은 모두 음악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곧바로 깨졌습니다. 이런 건 처음입니다. 음악을 오해한 적은 많아도, 이렇게 몰상식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지리멸렬한 드라마는 청자를 끌고 가는 음악의 구심점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가졌던 생각이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항상 악절을 끌고가는 어떤 악기를 중심으로 피라미드 같은 뾰족한 관현악을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상교향곡 3악장처럼, 어딘가에 깊숙하게 핀포인트가 박혀있는데, 그게 영 적응이 안 됐단 말이죠. 어색한 관현악은 앞서 설명했듯이 제 게으름에 가깝고... 설익은 어법도 그렇습니다. 실험적인 형식이나 관현악 모두 굳이 지금 들을 가치가 있나 싶었죠. 그래서 <레퀴엠>에 큰 애정이 없었던 것 같네요. 하나 추가하자면, 베를리오즈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표현에 애정이 없었습니다. 빛에 따르는 어둠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어제는 그런 불호가 매력으로 바뀌더군요. 연주에 여러 결점이 분명했음에도 말입니다. 같은 시간 있었던 서울시향의 롯데 콘서트홀 개관 공연에 청중을 빼앗겨 텅 빈 객석이 아쉬울 뿐이었죠. 


모든 걸 이끈 성악의 성공입니다. 캐스팅부터 성공이 보장되었죠. 심지어 베셀리나 카사로바가 대타로 오지 않았습니까? 배역의 최고 해석가가 대타로 왔습니다. 2013년 개천절 파르지팔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땐 온 우주의 기운이 감싸고 있어서..., 누가 와도 성공할 것 같았죠. 사무엘 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해외에서 메피스토펠레 역으로 호평을 받아왔고, 그가 적재적소에 뿜어내는 사악함과 표현력을 생각한다면, 누가 이걸 마다하겠습니까. 강요셉 역시 A급 성악가로 오래전에 인정받았죠. 개인적으론 방송 녹음에서 그 역량을 확인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듣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습니다.


(저는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딕션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걸 먼저 밝히겠습니다)


강요셉은 시작부터 서정적인 음색으로 사람을 설레게 했습니다. 파우스트에게서 나타나는 양면적인 고뇌를 드러내는 복합적인 음성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 역할은 그게 절대적인 미덕은 아니죠. 시종일관 반주에서 그로테스크한 우수가 뚝뚝 떨어지니까요. 시원한 고음을 받쳐주는 묵직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성악가에게 분명히 쉽지 않을 예술의 전당을 꽉 채우는 성량을 가졌고요. 최근 경험한 테너들은 모두 그런 성량이 부족했기에, 더욱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수와의 앙상블/연기도 수준급이었죠,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품에 익숙하진 않았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끝마치자면, 세 명 모두 A급 성악가답게 몸에 연기가 베어 있더군요. 분명 리허설에서 계획하지는 않았을 탁구공이 오가는 듯 한 반응이 눈에 띄었습니다.


카사로바는 조금 특이하죠. 사포로 공들여 연마한 듯한 음성. 이 가수는 바로크 오페라에서 큰 성과를 내는 음절 단위의 섬세함이 장점이지만, 동시에 극장을 뜨겁게 달굴 힘이 있죠. 마르게리트는 크게 두 곡의 아리아를 부르는데, 살며시 등장해서 특유의 몸동작을 보이며 순식간에 공간을 채우더군요. 얼핏 존재감이 부족해 보여도, 내공이 대단한 가창이었습니다. 특히 여린 음이 정말 강하게, 끈질길 정도로 직선적으로 귀에 달라붙었는데, 이런 음성 전달은 실황에서 처음 들어보네요. 당분간은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사무엘 윤은 극을 통째로 이끌었습니다. 압도적인 음성 연기입니다. 아리아를 레치타티보처럼 쉽고 자연스럽게 부르는데,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전함 같은 성량과, 모음을 효과적으로 조절해서 만드는 흡입과 타격, 가사와 음악에 대한 완벽한 이해, 몸에 배어있는 연기까지 겹치며 제대로 연쇄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연극배우가 대사를 뱉듯이 노래하니까, 그를 중심으로 3막과 4막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기더군요. 물론 악마보다는 비열한 인간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불가항력의 악마보다는, 이성으로 판단해볼 만한 인간의 모습이 다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막의 말을 달리는 장면이 유난히 기억에 남네요. 대다수 성악가가 평이하게 표현해온 '이랴' 소리가, 어제는 채찍의 충격파처럼 강하고 날카롭게 객석을 후려쳤습니다.


경기필은 삼류 오케스트라가 아닐 겁니다. 악기 단위의 탄탄한 합주력과 기본기가 알게 모르게 드러나더군요. 하지만, 리허설 부족으로 보이는 - 특히 1막의 - 장면이 많았습니다. 리듬이 완전히 엉켜서 처음에는 다른 판본이 있나 싶었습니다. 이건 에밀 타바코프의 책임도 큽니다. 정말 무표정한 로봇처럼 지휘하더군요. 어떠한 성의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았습니다. 해석이랄 것도 딱히 없던 것 같고, 그냥 악보를 따라가는데 급급한 지휘였습니다. 물론, 악단 역시 프랑스 음악을 한 차원 높게 완성하는 DNA가 부족하긴 했습니다. 지휘자에 대한 반응속도가 느리고, 특히 현악 군의 섬세한 표정은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합창단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그 작은 편성으로 높은 강도의 음성을 유지했으니, 만족합니다. 


베를리오즈에는 분명 윌리엄 블레이크를 떠올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사실성과 거리가 먼 서투름이나 엉성함이 있죠. 이건 21세기의 심성으로 판단하는 엉성함이지만, 실제로는 앞선 세대가 성취한 위대한 표현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겁벌>에서 베를리오즈는 얼핏 단순하고 지루한 악절을 가지고, 생동감 넘치는 라틴의 풍경을 거대하게 그려냈습니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들, 빛과 어둠의 극단적인 대조, 졸졸대는 초원, 즉 자연에 촉촉하게 묻어나는 고독감. 신성함. 이게 정말 포기하기 힘든 매력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다니요.


베를리오즈를 더 열심히 듣겠습니다. 이상 반성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