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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기타

마술피리 (2006년 취리히 오페라 DG)

by Chaillyboy 2016. 9.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마술피리 K. 620 (1791) 

자라스트로: 마티 살미넨

밤의 여왕: 엘레나 모슉

파미나: 율리아 클라이터

타미노: 크리스토프 슈트레흘

파파게노: 루벤 드롤레

파파게나: 에파 리바우

대변인: 가브리엘 베르뮈데즈

모노스타토스: 루돌프 샤싱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연출: 마르틴 쿠셰이

무대 디자인: 롤프 글리텐베르크

의상 디자인: 하이디 해클

촬영: 크리스토프 힝크


2007년 2-3월, 오페라 하우스, 취리히


DG 004400734367


  

마르틴 쿠셰이는 <마술피리>를 제안받은 연출가라면 누구나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고 말합니다. 극장의 단골 레퍼토리이고, 툭 하면 어린이 오페라로 올라오듯 대중적이지만, 연출하기 까다로운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키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다차원의 떡밥들, 얼핏 정제되고 상징적으로 보이지만 파고들수록 복잡한 - 그래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양파 같다고 말한 - 인물의 성격, 음악의 고증. 여기에 현대인에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여성차별까지 포함되니, 어떤 연출가가 눈물을 안 흘리겠습니까.


그만큼 고민 없는 연출이 넘쳐납니다. 쿠셰이가 대놓고 언급한 제피렐리 같은 연출이, 혹은 아르농쿠르는 설탕 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었다고 표현한 연주들이, 얼핏 모차르트와 쉬카네더의 의도를 잘 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면만 핥으며 시간의 누적이 만든 편견을 더 키우거나, '얼씨구, 잘 들었다' 정도로 감상을 끝내게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아르농쿠르와 쿠셰이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설탕 덩어리 메타포는 어떻게 읽어도 탁월합니다. 음악을 바라보는 아르농쿠르의 테제를 낱말에 통째로 응축시켰죠. 분명히 이 위대한 혁명가에게는, 세기말 유럽인이 생각하던 혁신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건축의 혁신이나, 미술의 혁신 말입니다. 군더더기를 없애고, 본질에 집중하는 시도에서 출발해서, 얼핏 기능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 같지만, 강력한 미학을 성취했죠. 


이 프로덕션 또한 그렇습니다. 연출과 연주 모두 본질에서 출발해서, 강력한 미학을 만들었어요. 내공이 탄탄한 - 거의 글라인드본이 떠오르는 - 취리히의 가수들이 받쳐주고요. 그야말로 잘 뽑힌 영상입니다. 블루레이로 발매되지 않고, 심지어 절판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쿠셰이의 시도는 효과적입니다. 마술피리를 (신혼) 부부의 꿈으로 설계합니다.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결혼사진을 찍는 타미노-파미나 부부는 서곡이 끝나자, 불가항력적으로 어떤 세계로 빨려 들어갑니다. 헤매고, 재회하고, 다시 헤매며 극이 끝날 때 부부는 현실로 돌아옵니다. 설계한다는 말이 맞을 텐데, 이 세계는 미궁이기 때문입니다. 기하학적인 벽이 미로를 구성하고, 자연스럽게 공간들이 만들어집니다. 타미노와 파미나는 같은 곳을 배회하지만, 공간을 끊임없이 변주됩니다. 새로운 장소를 계속 탐험하는 느낌이 들죠. 시각적으로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미궁에서 신혼부부의 악몽이 사실적으로 재현됩니다. 많은 분이 결혼한 - 즉, 서로 잘 아는 - 타미노와 파미나를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신혼부부에게 상대방은 잘 알면서 전혀 모르는 존재잖아요? 경계와 불안의 대상이죠. 악몽 속에는 다양한 걱정과 편견, 현실에서 억압되었을 상상이 맥락 없이 표출됩니다. 장모와 후견인에 대한 성욕,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 혹은 블루칼라에 대한 경계. 연출하기 까다로운 인종차별 역시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21세기 상류층 백인에게 충분히 있을 법한 편견이 꿈에서 나타난 거죠. 이건 치트키 같지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응집력이 부족한 플롯은 꿈에서 당연한 서사가 됩니다. 쿠셰이는 리얼리즘과 환상성을 동시에 잡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전통적인 연출이 아닌 여기서 타미노-파미나 커플의 순애를 구구절절 느꼈습니다. 욕망과 염려를 붙들고 헤매지만,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을 순도 높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름과 인화성 물질이 가득한 암실을 촛불과 서로에 기대어 헤쳐나가는 장면이 가슴을 울리더군요. 신혼부부의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아르농쿠르는 여기서도 특이한 연주를 선보입니다. 피가로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해석이 어느 정도 골격을 이루죠. 호불호가 갈려도, 인물들의 심리를 거시적으로 통찰하며 반주하고, 연출과 어울리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의 건조한 음향이 - 발매되는 모든 영상물에서 느껴지는 결점이죠 - 아쉬울 수 있습니다만, 오케스트라가 워낙 깔끔하게 잘 연주해서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가수는 만족스럽습니다. 취리히 오페라의 모차르트/슈트라우스 가수들은 항상 기대 이상입니다. 크리스토프 슈트레흘의 타미노는 흠이 분명하지만, - 어쩌면 의도했을 - 무기력한 해석만 적응된다면 괜찮을 겁니다. 놀라운 건 율리아 클라이터입니다. 서정적이고 깔끔한 기교와 목소리에 먼저 놀라고, 파미나를 몸에 체화한 듯한 고결함과 순수함이 가수를 감쌉니다. 리사 델라 카사같은 과거 명가수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거기 근접했다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이 가수를 모두 들어보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루벤 드롤레는 여기서 메이저 극장에 처음 데뷔했는데, 신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자연스럽고, 사람을 휘어잡는 연기와 가창으로 객석의 힘찬 박수를 이끌었습니다. 파파게노 역시 악몽의 일부분으로 구성된 연출이기에 조금 더 깊숙하고 날이 선 가창이 어울렸겠지만요.


당시 취리히 극장에선 '라이브 온 메트'를 본뜬 프로젝트를 기획했나 봅니다. 이 연주는 유럽에 생중계되었고, 40분에 달하는 부가 영상이 공연 전후의 극장을 활발하게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였는지, 질 떨어지는 촬영이 안타까운 수준이었습니다. 조잡한 카메라 동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르틴 쿠셰이에게 광적인 에고(egomaniac)의 레지테아터 운운하는 질문을 하지 않나 (쿠셰이는 논센스라고 짧게 답한 뒤 3초간 기자를 째려봅니다),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터미션의 가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방해를 하는 인터뷰가 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취리히의 영상물에서 이런 시도가 사라진 걸 보면, 뻔하고 작위적인 메트의 인터미션 촬영에 들어갔을 뼈를 깎는 노력과 상업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