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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기타

코지 판 투테 (2006년 글라인드본 축제 Opus Arte)

by Chaillyboy 2016. 9. 6.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1789)

피오르딜리지: 미아 페르손

도라벨라: 안케 본둥

페란도: 토피 레티푸

굴리엘모: 루카 피사로니

데스피나: 에노아 가르멘디아

돈 알폰소: 니콜라스 리벤크


이반 피셔, 계몽 시대 오케스트라

포르테피아노: 조나단 힌덴

글라인드본 합창단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무대, 의상 디자인: 비키 모티머

조명: 파울레 콘스터블

촬영: 프란체스카 켐프


2006년 6월 27일과 7월 1일, 글라인드본 오페라 하우스, 루이스


Opus Arte OABD7035D


    

글라인드본과 <코지 판 투테> (이하 <코지>)의 관계는 각별합니다. 흔히 이 오페라가 오해당했다고 말해지는 1945년 이전에, 생명력을 가진 프로덕션으로서 오래 상연되고, 또한 음반이 제작되어 세계적인 담론을 만든 경우는 1934년 글라인드본이 유일하죠. 최초였고, 저는 그 프로덕션이 이후 모차르트 오페라의 범주를 결정했다 생각합니다. 다 폰테 삼부작에 <마술피리>를 일종의 주류로 취급하는 경향 말입니다. 즉, <코지>는 제대로 평가 받기 전 부터 주류에 편입된 셈이니, 글라인드본에 많은 빚을 졌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물론 이전에도 종종 회자된 경우는 있었습니다. 예컨대 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오토 클렘페러와 구스타프 그륀트겐스가 올린 프로덕션이 그렇죠. 많은 이가 작품을 미심쩍어했지만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무대 극으로서 <코지>를 저평가했죠 - 구스타프 말러, 그리고 뮌헨의 극장지휘자들(헤르만 레비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브루노 발터, 어쩌면 칼 뵘)은 <코지>를 극장에 편입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만약, 자유로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신이 조금 더 길게 살아남았다면, 그래서 독일에서 전곡 녹음이 이루어졌다면, <코지>에 대한 재평가가 더욱 빨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건 녹음입니다. 수전 손택이 흥분을 감추지 않고 일기장에 적은 것 처럼, 글라인드본의 레코드가 지식인층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음악적 탁월함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표준을 머리 속에 그리죠. 미세한 경험들은 비평으로서 상호작용하는데, 그렇게 연주 경향이 조금씩 변화합니다. 30년대의 그 연작 레코드는 존 크리스티와 월터 레그의 일시적인 승리였지만, 이후에도 글라인드본은 부침 없이 꾸준하게 녹음과 영상 자료를 발매했죠. 결국 우리가 얼핏 느끼는 것 이상으로 이 축제가 고전음악 연주 문화에 끼친 영향은 작지 않아보입니다. 소비적인 재포장에 만족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기도 하고요. (돈도 두둑히 챙기는 글라인드본, 메트는 의문의 2패...)


이 블루레이 역시 그렇습니다. 진보적으로 새로운 전경을 탐사하지는 않죠. 하지만 흠집 없는 탁월함으로 당대의 성과를 훌륭하게 집대성하고, 대중성을 붙잡아 널리 영향을 끼칩니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죠. 특히 <코지>가 요구하는 예술적인 - 기본기만 가지고 날렵하게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 까다로움을 고려해본다면, 많은 부분을 놓치면서 개척을 시도하는 연주보다 이런 집대성이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반 피셔와 니콜라스 하이트너는 성공적으로 기준 말뚝을 박은 셈이죠.


니콜라스 하이트너는 영국 극단에서 뼈가 굵은 사람인데, 노련한 기본기를 수족처럼 선보입니다. 이건 글라인드본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연출 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선을 절제하고 횡축으로 제한하되, 섬세한 연기지도로 인물의 본성을 극을 해치지 않는 수준까지 최대한으로 끌어올립니다. 조명이 만드는 색채는 얼핏 낮/밤만 지시하는 것 같지만, 섬세하게 색조를 바꾸면서 음악과 함께 인물(과 청중)을 화장합니다. 하지만 플롯 이외의 요소가 절대로 압도하지는 않죠. 이 프로덕션의 중심은 연기입니다. 극 <코지>를 평가절하한 카라얀이 이 연출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계몽 시대 오케스트라는 글라인드본의 제2 함대죠. 1995년 글라인드본에서 이 오케스트라는 사이먼 래틀과 <코지>를 반주하기도 했는데, 당시나 지금이나 연주 성향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 악기를 사용하면서, 풍성하게 퍼지는 현대적인 음향을 붙잡는 절충적인 성취를 이루어내죠. 이는, 오케스트라가 래틀이나 유로프스키, 혹은 여기서 지휘한 이반 피셔같은 현대 지휘자와 지속적으로 협업하면서 만들어낸 사운드이기도 할 겁니다. 잔향이 약간 부족하지만, 피셔의 선율을 따라가며 감정을 쌓는 낭만적인 지휘와 함께 좋은 시너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반은 아담 피셔에 비해 극장 경력이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져 보이지만, 여기선 그런 편견이 무색하게 뛰어난 극장 반주를 보여주네요.


글라인드본의 또다른 미덕은 어디 하나 부족하지 않은 뛰어난 성악 캐스팅일겁니다. 대중성이 (아주) 약간 덜 두드러지는 가수가 주로 나오는데, 메트나 빈을 열광시키는 특급 스타보다 실력이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가창 자체도 뛰어나지만, 놀랄만큼 앙상블이 탁월하고, 글라인드본에서 요구하는 까다로운 연기를 자유자재로 해내니까요.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