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잡설/공연 후기

피에르 몽퇴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2년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BBC Legends)

by Chaillyboy 2016. 9. 12.


 엑토르 베를리오즈: 파우스트의 겁벌 Op.24 (1845)

파우스트: 앙드레 튀르프

메피스토펠레: 미셸 루

마르게리트: 레진 크레스팽

브란더: 존 셜리-쿼크


피에르 몽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리마스터링: 폴 베일리, 리:사운드


1962년 3월 8일, 로열 페스티벌 홀, 런던


BBCL4006-7

  

  

피에르 몽퇴 - 음미하기


"아는 사람만 소문내고, 노래하고, 감탄을 보내는",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가 프랑스 지휘자에게 던진 찬사인데, 이건 피에르 몽퇴가 그의 길고 - 전시 행적을 제외하면 - 활발한 경력동안 같이 일해온 음악가들이 그에게 던진 수 없이 많은 찬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몽퇴의 이름이 가정 음악 카탈로그에 없는 건 정말이지 의아한 일이다. 어찌됐건, 그는 1890년대 후반 작곡가가 건반을 직접 연주한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했고, 또한 지휘봉을 휘두르던 70여년 동안 - 몽퇴는 1964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쉬카봄의 제전,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드뷔시의 유희를 초연했고, 7000회가 넘는 콘서트에서, (1959년 3월 31일 타임스 기사에 의하면) 102개의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것이다.


몽퇴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던 그의 말년동안, 유명할 정도로 생기 넘치는 팔순노인으로, 그리고 그 기간동안 취입한 적지만 값을 매기기 힘들 녹음(스튜디오의 상업 녹음과, 그리고 여기 있는, 실황 테이프)들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명성은 경력 초기에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하며 키워져 왔으며, 당대의 경쟁자 (보스턴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와 (암스테르담의) 빌렘 멩엘베르흐는 그런 관계를 즐기기도 했다. 기억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특히 말년에, 그는 ("에로이카"라고 불렀던) 세 번째 부인에게 회고록 음악에 다 있다구(뉴욕, 1965)에서 자부심 가득하지만 그 답지 않은 씁쓸함을 담아 - 겨우 오년 밖에 안된 (1919-1924년)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짧은 음악 감독 생활을 회상했는데, 당시 그는 노조 문제와 추방당한 독일 단원들 때문에 복구가 힘든 오케스트라의 옛 영광을 되찾아줬던 것이다. 우리는 보스턴 이사회가 1924년 몽퇴의 계약을 연장하기 않고, 그 자리를 쿠세비츠키에게 넘긴 정확한 이유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몽퇴는 동시대 음악을 너무 많이 연주해서 보스턴을 화나게 만들긴 했다; 또한 발레에서 명성을 쌓은 지휘자에게 오명이 따라붙었을테고; 혹은 쿠세비츠키가 음악을 만들때 나타낸 더 즉각적인 카리스마에 끌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게 어떤 동기였건, "공식적인" 이유는 또 다른 장기 집권을 원하지 않았다는 건데. 보스턴에서 쿠세비츠키의 "전설적인" 25년을 생각해 본다면, 몽퇴의 씁쓸한 회상은 납득이 된다. 그는 쿠세비츠키의 재임 기간에 그 보스턴 오케스트라를 한 차례도 지휘하지 않았고, 쿠세비츠키의 후임인 샤를 뮌쉬의 설득 끝에야 (객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전간기의 유럽은 몽퇴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기간에 그는 파리 교향악단을 만들고,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에서 멩엘베르흐의 보조 지휘자[각주:1]로 일했다. 1936년이 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당시 파산한 오케스트라를 재건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몽퇴처럼 넓은 레퍼토리를 가진 지휘자는 (어쩌면 지금도) 없다. 경력에서 잘 알려진 이정표나 녹음을 보건데 그는 프랑스나 러시아 음악 전문가로 보인다 - 행복한 조합인데, 베를리오즈의 영향을 받은 국민-낭만주의 러시아 작곡가와,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 받은, 차례대로, 스트라빈스키, 드뷔시, 그리고 라벨이 있다. 하지만 그는 하이든, 베토벤과 브람스를 설득력 있게 연주하는 몇 안되는 프랑스 지휘자기도 했다. 현악기를 다루던 젊은 시절 -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주자, 그리고 젤로소 사중주단의 비올라 주자로서 - 그는 독일-오스트리아 전통을 긴밀하게 경험했던 것이다. 게다가, 젤로소 사중주단에서 보낸 첫 해(1894)에, 그는 브람스의 현악 사중주 한 곡을 작곡가가 보는 가운데 연주하기도 했다 ("강인함과, 수염, 그리고 꽤나 슬퍼보이던 눈동자"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훗날 슬프게 고백하지만). 또한 70대의 몽퇴는 어떤 자리에서, 하이든 사중주를 연주하려던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이 비올라 주자가 없는 걸 연주 바로 전에야 깨닫자, 앞으로 나섰고, 사중주를 수 년간 연주하지 않았음에도 악보나 리허설 없이 비올라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몽퇴가 베토벤과 바그너, 브람스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어도, 그가 보통 동향 작곡가들에 애정과 권위를 보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베를리오즈라면 말이다. 브람스 앞에서 연주한 해, 19살의 몽퇴는 "콩세르 콜론"의 비올라 수석 단원으로 (곧 보조 지휘자와 합창지휘자가 되지만) 고용된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에두아르 콜론 (1838-1910)은 개인적으로 베를리오즈를 알았는데, 작곡가가 지휘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스스로를 베를리오즈 챔피언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몽퇴는, 자기 차례가 되자, 콜론에서 베를리오즈를 꽤 지휘했고, 콜론의 지시와 그 직관을 자기 총보에 모두 옮겨적을 기회를 붙잡는다. "내 생각에 나는 콜론을 통하여 엑토르 베를리오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그는 훗날 "내가 자필본을 보며 연습했다고 사람들이 말하곤 했다"고 언급한다. 1911년, 콜론이 죽은 바로 다음 해,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쉬카의 초연 전 몽퇴가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접촉하던 때, 이 젊은 지휘자는 카지노 드 파리에서 "콩세르 베를리오즈"라는 시리즈 공연을 스스로 기획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시절 프랑스에서, 파우스트의 겁벌은 베를리오즈의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사랑받았는데, 작곡가가 부른대로 이 "극 형식의 전설"의 인기는, 괴테의 극을 옮긴 구노의 작품과 대적할 만 했다. 하지만 반 세기 전, 1846년 오페라 코미크의 초연을, 베를리오즈는 이렇게 회상했다. "파우스트는 반 쯤 빈 객석 앞에서 두 번 연주되었다. 유행을 타는 파리 관객들은 ...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었고, 신작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어 마치 내가 음악원의 무명 학생이 된 것 같았다 ... 이 무관심만큼 예술가로서 내 경력이 깊게 상처받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파우스트가 파리에서 성공하게끔 변화를 준 가장 큰 공로는 콜론에게 있었는데; 베를리오즈가 죽은지 팔년 뒤에, 그는 작품을 부활시켰고, 30년간 놀랍게도 172번이나 작품을 지휘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 몽퇴는 "황폐해졌는데" 나치는 점령한 파리에 있는 그의 집을 쓸어갔고, 그는 콜론의 지시가 적혀있는 베를리오즈 (를 포함한) 악보들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 쯤에는 숙련된 베를리오즈 지휘자에게 "원전을 통한 연습이" 거의 필요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 담긴 파우스트의 겁벌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몽퇴가 남긴 상업 녹음들 중 베를리오즈는 아주 적은데, 파우스트의 겁벌은 - "헝가리 행진곡"만 따로 한 걸 빼면 - 전혀 녹음하지 않았다. 게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약간 추측하건대, 상업 녹음보다 실황 연주에서 본인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고 믿을 구석이 있다. 언젠가 몽퇴는 자신이 만든 대부분의 음반은 녹음 테크닉때문에 자발성이 사라져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분명히, 그는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비평가였다 - 정확히 말하면, 그의 녹음 유산 대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도 느끼듯이, 과하게 엄격했다 - 하지만 스튜디오 녹음으로 비교가 가능한 "실황" 연주는 지휘자나 연주자 모든 차원에서 그런 경향을 증언하는데, 예컨대, 최근 발굴된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1948년 실황과 (몽퇴의 다섯 연주 중 하나), 1963년 빈 페스티벌에서 녹음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차이코프스키 연주가 그러하다 - 모두가 스스로를 뛰어넘은걸로 느껴지며, 앙상블의 위험을 성공적으로 처리했고, 완벽하게 균형잡힌 상태에서 해석과 번뜩이는 즉흥성 모두를 성공적으로 잡아낸 것이다.


몽퇴가 새롭게 되살아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던 말년은 고평가 받을 만 했는데, 단원들은 그를 존경하고 아주 좋아했다. 당시 LSO의 수석 트럼페터였던 빌 랑은 오케스트라 앞에서 "몽퇴는 오케스트라에 대한 모든 걸 이해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천재입니다; 음악의 뒷면까지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젊은 날 오케스트라에서 현악 단원으로 일해본 건 프랑스 지휘자들의 특징으로 보이는데, 몽퇴는 스스로 이 경험을 중요하게 간직했고, "현악기를 연주한 적 없는 지휘자는 쉽게 말해 서로 다른 음향을 만들줄 모른다; 현악 연주에서 활은 그 만큼 중요한데 같은 음표를 소리내는데 아마도 50가지나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를 경험한 다른 장점도 있는데, LSO의 수석 호른주자 베리 터크웰이 말했듯이, "당신이 오케스트라의 중저음을 연주한다면, 그건 마치 다른 선수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것과 같다". 자, 그건 지휘자가 하는 일을 완벽하게 정의한 게 아닐까!

   

조나단 스웨인, 1998년 (내지를 번역함)


오케스트라 음향이 참 좋네요. 미친듯이 발산하지는 않지만, 현악 사운드를 단단하게 고정하면서 음색에서 환상성을 이끌어내요.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서서히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연주인 것 같습니다. 플룻도 인상적인데, 당시 플룻 수석이 누군지 모르겠네요. 유명한 사람이긴 할텐데.. 여기서 뱀발로 붙이자면, 1950년대 후반 토마스 비첨이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당시 LSO에서 단원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에 이 오케스트라가 위기에 처합니다. 되살아났다는 맥락이 거기에 있죠.


성악은 대체로 무기력한데, 바리톤 목소리가 너무 높아요. 테너랑 구분도 잘 안되거니와, 전혀 악마같지도 않습니다. 레진 크레스팽은 인상적이에요. 텍스트를 유유자적 따라가면서, 내재된 서정성을 끝까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몽퇴는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 번역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더 많이 들어봐야겠어요.


ps. 플루티스트. Alexander Murray라는 사람이라네요. 정확히는 저 시절 몽퇴의 레오노레 서곡 독주자를 알아낸거지만, 스타일이 비슷한걸로 보아 같은 사람일겁니다. 브루크너씨 고마워요.

  1. 원문은 assistant conductor. 오케스트라에서 수여한 공식 직함은 'eerste dirigent'인데, 수석 객원 지휘자가 더 적합한 명칭일 겁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