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난봉꾼의 행각 (1951)
앤 트루러브: 미아 페르손
톰 레이크웰: 토피 레티푸
파더 트루러브: 클리브 베일리
닉 섀도우: 매튜 로즈
마더 구스: 수잔 고튼
바바 더 터크: 엘레나 마니스티나
셀렘: 그래함 클라크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글라인드본 합창단
연출: 존 콕스
무대, 의상 디자인: 데이비드 호크니
조명: 로버트 브라이언
촬영: 프랑수아 루시용
2010년 8월 19-21일, 글라인드본 오페라 하우스, 루이스
Opus Arte OABD7094D
An Introduction to The Rake's Progress from Glyndebourne on Vimeo.
글라인드본을 만든 존 크리스티는 자신의 축제에서 <난봉꾼의 행각>이 연주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만큼 글라인드본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 없죠. 루이스의 햇살 따스한 정원처럼 18세기의 영국적 덕성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어디 있을까요. 그리고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말했듯이, 그런 정원의 이상을 공유하는 작품이 바로 윌리엄 호가스의 <탕아의 편력>, 즉 오페라의 직접적인 모티브입니다. 물론, W. H. 오든과 채스터 칼만의 독특한 대본은 작품의 층위를 넓혔지만 - 한 평론가는 오든의 <불안의 시대>를 연관짓기도 합니다 -, 결국 작품의 중심이 되는 도덕성은 글라인드본으로 돌아오죠. 물론, 여기서 도덕은 그저 소재일 뿐이라는 반론이 가능하지만, 그게 크리스티의 맥락은 (절대로) 아니었을 겁니다.
<난봉꾼의 행각>은 확실히 독특하고, 비범한 작품입니다. 물론 비판도 많죠. 무의미한 짬뽕이라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설득력 있습니다. 저는 몬테베르디로 시작 해서 "Sempre libera"로 끝나는 1막이란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게다가 작곡 연도(1951)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년(零年)의 분위기가 허무하게 지배하는 유럽이었죠. 한 편에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베토벤의 박애정신를 통해 인간성의 재건을 상징적으로 외치고, 반대편에서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다름슈타트의 작곡가들이 모든 걸 부정하며 신세계를 찾기 위해 촉감 하나만 믿고 암흑으로 뛰어들던 때입니다. 대놓고 말해 이건 반동이죠.
그럼에도 작품은 살아남았습니다. 피에르 불레즈 같은 급진 아방가르드의 비판처럼, 대중의 보수적 취향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작품에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어요. 예컨대 오든과 칼만이 - 그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 창조한 바바 더 터크란 인물은, 작품을 18세기 교훈극 너머로 상승시킵니다. 제겐 바바 더 터크를 중심으로 작품의 아이러니함과 도덕적 정화가 멋지게 합쳐지네요. 여기에는 음악도 한 몫 하는데, 3막의 경매 장면에서 스트라빈스키와 오든은 염세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압축시켜 음악에 녹여냅니다. 특유의 설계된 리듬이 요지경처럼 발산하면서, 대사와 합창이 무절제하게 흩어지는데, 앤과 바바가 절묘하게 삽입되며 완급조절이 이루어지죠. 순식간에 관객을 집중시키는 실력입니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가 오페라 작곡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몰입도의 측면에서, 플롯의 클라이막스인 카드게임 장면은, 예컨대 푸치니가 <서부의 아가씨>에서 그린 카드게임에 비하면, 긴장감이 많이 떨어집니다. 물론, 이건 푸치니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문법이 서로 닮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난봉꾼>의 서사는 꾸준히 연결되지 못한다는 느낌도 가끔 듭니다. 주인공 커플은 극의 구심점이 못돼고요.
크리스티씨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존 콕스가 연출한 1975년 글라인드본 프로덕션은 고전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영상이 지금도 유통되고 있죠. 하지만, 그 연주는 이제 기록의 가치만 남은 것 같습니다. 2010년 재상연을 담은 이 블루레이는 모든 측면에서 빼어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존 콕스와 디자이너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번 재상연에서도 연출과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존 콕스의 연출 자체는 무던한 편이죠. 인물들의 색채를 무난하게 살리고, 예컨대 3막 경매장면의 합창단 연기지도는 훌륭합니다만, 글라인드본의 다른 연출들에 비해 톱니바퀴가 맞아 떨어지는 특유의 느낌이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색다른 해석을 시도하지도 않고요. (아, 1막 2장 매음굴 장면에서 <파르지팔>의 성배의식이 잠깐 떠올랐는데, 연출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면 찬사는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돌아갑니다. 신문 만화처럼 굵은 선이 두드러지는 무대와 의상, 소품이 신고전주의 음악과 기가 막히게 어울립니다. 장소마다 어울리는 타이포그래피가 교훈극의 분위기를 키우고, 매음굴과 정신병원을 흑과 백처럼 대비시킨 듯한 무대 구성 역시 훌륭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야 말로 연주를 지배했습니다. 시선을 넓게 잡으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발 끝까지 제어하는 강렬한 지휘가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에서 최고의 성과를 만들었어요. 스테인레스 강으로 벼려놓은 듯 날카로운 프레이징이 먼저 눈에 띕니다. 목관과 금관은 앙상블을 유지하며 강렬한 어택을 지구력 있게 해내죠. 오케스트라의 체급이 대단하네요. 한편, 유로프스키는 카라얀이 그랬던 것 처럼 일말의 미동 없이 음악을 완벽하게 내보내는데, 그에게는 음악의 열광에 전혀 흔들리지 않을 강단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가수 또한 훌륭합니다. 토피 레티푸와 미아 페르손은 글라인드본 <코지 판 투테>에서 그랬듯이, 훌륭한 커플입니다. 두 가수의 음색은 서로 공명하는 것 같죠. 레티푸는 지구력 있게 세 개의 막을 잘 이어나갔습니다. 다채로운 표정이 부족한 게 아쉽지만, 톰은 수동적인 역할이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미아 페르손은 사랑을 잘 알죠. 이 가수를 (<피가로>와 <코지>에서) 들을 때 마다, 성악적인 탁월함에 앞서 어떤 구구절절함이 파고드는 느낌입니다. 아마 좁혀진 듯 울리는 고음이 그런 효과를 주는 것 같은데... 네, 트루러브 맞네요. 매튜 로즈는 뭉툭한 망치같은 음색이 악마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능구렁이같은 연기가 잘 보완해준 느낌입니다. 게다가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에선 이아고 같은 악마성이 발 붙일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이니까요.
참고로 3막에서 경매인으로 그래함 클라크가 나옵니다. 어째 예전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르시네요... 나이 든 목소리가 특유의 음색에 시너지를 준 느낌입니다. 바그너 오케스트라를 뚫을 성량은 사라졌겠지만, 글라인드본에선 전혀 문제가 없죠. 채찍질을 하듯이 3막의 휩쓸리는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가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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