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1857-1859)
트리스탄: 스티븐 굴드
이졸데: 에벨린 헤를리치우스
쿠르베날: 이언 패터슨
브랑게네: 크리스타 마이어
마르케 왕: 게오르크 제펜펠트
멜로트: 라이문트 놀테
목동, 젊은 선원: 탄젤 아크지벡
타수: 카이 슈티퍼만
크리스티안 틸레만,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연출: 카타리나 바그너
무대 디자인: 프랑크 필립 슐로스만, 마티아스 리페르트
의상 디자인: 토마스 카이저
조명: 라인하르트 트라우브
촬영: 미하엘 베이어
2015년 7월, 축제극장, 바이로이트
DG 004400735254
(흔한 기자 요리하기)
이 리뷰가 나온 이상 다른 글을 쓰는건 의미가 없을 겁니다. 연출을 이렇게 집요하고 풍부하게 잡아냈는데... 제가 평을 덧붙이는 건 동어반복 혹은 의미없는 주석밖에 안되겠죠. 여기서는 인상만 간단히 추려보아요. 댓글 달듯이 말입니다.
1. <셔터 아일랜드>가 떠올랐습니다. 도취(Rausch)의 시점과 명징한 시점, 혹은 그들의 시점과 왕의 시점을 오가면서 사랑의 비극성이 강조되죠. 결국 관객의 시점은 - 혼란해 하는 - 쿠르베날과 왕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에서는 왕과 부하를 어떻게 읽을지 고민됩니다. 브랑게네가 (왕의) 하수인이라면 왕은 1막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겠죠. 저는 왕이 병리성을 관찰하는 임상의의 시선이든, 아니면 그냥 악역이든, 상황을 (극 중에선) 제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에게, 혹은 우리에게 사랑은 일장춘몽, 혹은 두 광인의 게임에 지나지 않아 버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진실됨을 느끼잖아요? 관객의 혼란과 역설이 커지는 지점이죠.
2. 진실을 찾아 헤메는 쿠르베날과 옳음을 찾아 헤메는 브랑게네의 대비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연출이 주변인을 많이 고민한 듯 보였어요. <트리스탄> 연출에서 인물들의 다채로움을 못 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라디오 극 같은 연출이 난무하는거죠. 물론 그게 나쁜건 아니지만...
3. 카타리나 바그너는 기본기가 훌륭합니다. 상징으로 인물의 심리를 시각화하고 긴장감을 높이는 기술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굴드가 말했듯이) 살아있는 무대를 이용하여, 연기되어지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날 것의 사람을 만들죠. <트리스탄>에서 이건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무대 역시 다양한 시선으로 활용합니다. 미궁의 앙상한 아가리, 그리고 - 심연에 가까워보이는 바이로이트의 - 깊이와 날카로운 빛의 대비, 혹은 부분과 전체. 미장셴 역시 근래에 봤던 오페라 연출중 두 번째로 좋았습니다. (하필 헤어하임의 <루살카>를 봐서...)
5. 스티븐 굴드에 대한 악평이 애호가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데, 전혀 이해가 안됩니다. 단단한 심지에서 꽃봉오리처럼 미성이 터져 나오는걸요. 지휘자 말처럼 <트리스탄>에서 단순한 아름다움을 느끼는건 잘못일지도 모르지만, 굴드의 가창은 설득력 있습니다. 고음이 살짝 좁게 들려도, 혹은 가사 이해의 부족함이 종종 보여도, 음색 자체가 트리스탄에 알맞게 스며들었습니다.
5. 헤를리치우스를 빼면 가수 대부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펜펠트는 인간성을 숨기고, 기교를 극한으로 드러내는 건조한 가창을 보여줬는데, 연출을 완벽하게 이해한 해석이었습니다. 쿠르베날/브랑게네는 모든 측면에서 흠잡을 구석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묘하게 매력이 가는 목소리에요.
6. 이런 틸레만이라니. 기자 말처럼 '덜 틸레만'스럽게 지휘를 해서 성공한 걸까요? 경험이 쌓이면서 해석의 폭이 넓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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