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슈 야나체크: 예누파 (1896-1902)
예누파: 아만다 루크로프트
코스텔니치카: 데보라 폴라스키
라차 클레멘: 미로슬라프 드보르스키
슈테바 부리야: 니콜라이 슈코프
할머니 부리요프카: 메테 아이싱
슈타레크, 방앗간 십장: 카로이 세메레디
시장: 미겔 솔라
시장 부인: 마르타 마테우
카롤카: 마르타 우비에타
이보르 볼튼, 마드리드 왕립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연출, 무대 디자인: 스테판 브라운슈바이크
의상 디자인: 티볼트 판크라에넨브루크
조명: 마리옹 유레트
촬영: 앙헬 루이스 라미레스
2009년 12월 22일, 왕립 극장, 마드리드
Opus Arte OABD7089D
<예누파>는 분명한 걸작이지만, 쉬운 오페라는 아닐겁니다. 특히 우리에게 말이죠. 예컨대 체코인이라면 음악이 가사를 완벽하게 채색하는걸 들으며, 마치 <명가수>에서 모티프 여럿이 가사와 조화를 만드는 동안 우리가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걸 경험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체코어를 (나아가 슬라브어를) 전혀 모르는 우리는 그런 표정에 공감하기 어렵죠. 다시 언급하겠지만, 야나체크가 향했던 극한의 사실주의 또한 오히려 작품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입증됩니다. 심지어 체코에서도 작품의 관현악을 덜 '기묘하게' 고쳐 올리곤 했거든요.
하지만 많은 걸작이 그러하듯 <예누파>역시 빠져나오기 어렵도록 매력적입니다. 단순한 기념비, 즉 역사적인 맥락에 머물 작품이 절대 아니라는거죠.
매력은 각자에게 다양하겠지만, 음악에서 시작하는게 좋을겁니다. 1막을 시작하는 음악은 방앗간의 물레를 강박적으로 묘사하죠. 작품은 상징적이지만, 동시에 사실적입니다. 끝없이 도는 물레방아는 모라비아 농촌의 정적인 풍경, 그리고 풍경에 예속된 주인공 예누파의 비루한 삶을 그립니다. 실제로 물레방아 리듬에 붙어있는 화성은 심리적 긴장감과 불안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중간중간 슈트라우스나 푸치니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관현악은 시종일관 경제적입니다. 일체의 감상성을 배제하고, 필요한 분위기와 선율만 간결하게 묘사하죠. 특이한 편성에서 풍성한 음향을 만드는 스트라빈스키 (혹은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슈트라우스)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들의 최적화와 다르게 야나체크는 효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누파>는 대편성이죠.
베리즈모가 사실을 붙잡으려 노력했다면, 야나체크는 그걸 진짜 붙잡았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작품의 모든 요소가 사실을 향하죠. 어떤 극적인 효과도 여기선 부차적일 뿐입니다. 그저 진실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작품은 말하는 것 같죠. 예컨대, 마치 반 박자 잘린 것 처럼, 김빠지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단호한 어택으로 음악은 끝을 맺곤 합니다. 그렇게 청중은 감상에 일절 빠지지 않게 되죠. 그런데, 이런 단호한 진실에서 기적적인 순간이 나타납니다. 제게 2막은 그런 수법이 통째로 녹아들어간 것 같았어요. 마치,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비루함을 지독하게 관찰해 숭고함을 찾았죠. 혹은 인물의 심리를 군더더기 없이 적확하게 묘사한다는 측면에서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연출 또한 그런 음악에 어울리게 절제하는 모습입니다. 관객을 기준할때 사선으로 축을 잡고, 거대한 벽과 어둠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죠. 인물들의 연기 역시 비슷하게 절제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거슬리는게 없는 만족스러운 연출이었는데, 다만 붉은 색의 물레방아를 무대에 드러내는게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수들은 전반적으로 훌륭합니다. 성악적인 쾌감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인물에 대한 연구가 깊이 이루어졌어요. 루크로프트는 주체 없이 이루어지는 억압에 고통받는 여인의 심리를 여러 층위에서 잘 구성했습니다. 선이 얇게 느껴지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처연함이 보입니다. 데보라 폴라스키는 공인받은 코스텔니치카일텐데, 고음에서 한계가 느껴지기는 합니다. 그래도 표현력이 워낙 좋아서 전혀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라차와 슈테바는 목소리 성격을 적절하게 분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슈코프가 직선적이고 효과적인 가창으로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슈테바를 그린 반면에, 드보르스키는 아래서부터 끓어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죄의식과 애정과 열등감이 혼합된 라차를 성공적으로 연기했습니다.
이보르 볼튼은 모차르트 전문 지휘자인줄 알았습니다. 아니죠. 헨델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브리튼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진 극장지휘자입니다. 여기선 무심한 듯 음악을 살리는 지휘를 보여줬습니다. 리듬과 다이나믹에 각이 잡히고, 표정이 보일락 말락하는게 인상적이죠. 육감적인 날카로움보다는, 서서히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스타일입니다. 말하자면 프랑스보단 독일 음악에 어울겠죠. 한편, 마드리드 극장 오케스트라는 내공이 상당합니다. 난곡임에도 불구하고 쳐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네요. 물론 균형감 있는 녹음 역시 이런 인상에 한 몫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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