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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공연 후기

소프라노 황수미 독창회 (브람스, 브리튼, 리스트, R. 슈트라우스) - 2017년 6월 16일 대전예술의전당

by Chaillyboy 2017. 6. 19.

 

요하네스 브람스:
다섯 개의 가곡 Op.106  제1곡 “세레나데” (1886-67)
여섯 개의 노래 Op.97  제1곡 “꾀꼬리” (1885)
다섯 개의 노래 Op.71  제3곡 “비밀” (1877)
여덟 개의 가곡과 노래 Op.59  제8곡 “그대의 푸른 눈” (1870-73)
여덟 개의 가곡과 노래 Op.57  제4곡 “아, 그 눈길을 돌리오”, 제3곡 “당신에게 사랑받는 꿈을 꾸었죠”, 제8곡 “우리는 걸었네” (1871)
 
벤자민 브리튼: "이 섬에서" Op.11 (1937)
 
프란츠 리스트: 페트라르카의 세 개의 소네트 S.270 (1852)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노래 Op.27  제3곡 “은밀한 초대” (1894)
 <마지막 잎새>에 의한 여덟 개의 가곡 Op.10  제 8곡 “위령제” (1885)
 네 개의 노래 Op.36  제3곡 “거기에 있지 말라고 말했지” (1897-98)
 다섯 개의 작은 가곡 Op.69  제3곡 “단조로움” (1918)
 다섯 개의 작은 가곡 Op.69  제5곡 “궂은 날씨”

 

(앙코르)
 
프란츠 리스트: 그것은 황홀한 일이어라 S.314 (1852)
이원주: 베틀노래 (2008)
프란츠 레하르: 주디타 (1933)  “너무나 뜨겁게 키스하는 내 입술"
 
소프라노: 황수미
피아노: 헬무트 도이치
 
2017년 6월 16일,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대전광역시
 

 

이 년 만에 찾은 대전예술의전당은 여전히 시원한 바람이 감싸고 있었다. 땀이 식고 의자가 편해질때 황수미가 입장했다. 반짝거리는 순백의 드레스가 눈길을 끌었지만 뒤이어 등장한 헬무트 도이치가 강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명성과 다르게 그의 반주는 평이하게 느껴졌다. 처음 두 곡의 머뭇거리는 리듬은 무덤덤하게 표현되었다. 흔히 반주의 대가로 꼽는 기젠이나 무어가 가진 찰떡같은 센스는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다. 황수미 역시 음색으로 사람을 휘어잡는 소프라노는 아니었다. 앙상블홀에 냉방이 나오지 않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쯤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연주에 휩쓸리고 있었다. 헬무트 도이치는 성악가의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반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의식 들어간 해석을 모두 배격하고, 소프라노의 호흡을 극단적으로 맞춰가는 게 아닌가. 드러내지 않을 때 드러나는 존재감. 황수미가 가사를 소화하는 방식, 낭송과 음성을 구성하는 방식을 막연하게 느낄 때 쯤에야 도이치의 무게를 깨달았다. 도이치의 반주는 음절 하나하나를 감싸며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도이치는 톤 컨트롤이나 아고긱 등 흔히 떠올리는 '작은 해석'을 절제했지만, 곡 전체를 조정하는 '큰 해석'을 시도하는 듯 보였다. 해석하지 않는 해석가. 그는 미묘한 강약 조절과 호흡 분배를 통해 프로그램의 극적 짜임새를 완성했다. 여기저기서 발췌한 가곡 모음이지만, 마치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것 같았다. 탁월한 흐름 느끼다보니 어느 순간 브람스가 끝나있었다.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경지였다. 
 
브람스가 황홀했다면, 브리튼은 탁월했다. 브람스와 다르게 이번엔 작곡가가 완성한 가곡집 전곡이었다. 도이치는 한 발 뒤로 물러나고 황수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미권의 숙련된 연극배우를 보는 듯했는데, 탁월한 기교와 분석을 바탕으로 가사가 요구하는 높낮이와 강조점을 관객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했다. 짐작건대, 그의 악보는 해석 포인트로 새카맣게 덮여있을 것이다. 하지만, 악보 중심의 이지적인 해석은 전혀 아니었다. 어쨌든 황수미는 오페라 가수다. 폭발적인 음성과 무대매너로 관객을 즉시 열광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브리튼으로 보여준 셈 아닌가.
 
아쉬운 점도 없진 않았는데, 푹 퍼지는 앙상블홀의 음향이 브리튼의 허세 없는 인상 묘사를 제대로 전달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두 사람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부를 시작하는 리스트의 소네트를 가장 아낀다고 언급했다. 아쉽게도 제일 평이했던 연주가 아니었을까. 황수미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지만, 그런데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다만, 이탈리아 가곡이 다른 언어 사이에 툭 튀어나와서 어색한 측면이 있었고, 피아노가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여러모로 톱니바퀴 같은 앙상블의 두 예술가와 안어울리는 측면이 있지 않나 싶다. 솔직히 말하면 합을 덜 맞춰본 느낌도 있었다. 
 
R. 슈트라우스는 허겁지겁 끝난게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시간동안 슈트라우스 특유의 반들거리는 가사들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황수미의 공이었다. 어쨌든 독창회가 끝나고 기억에 남는건 "위령제"같은 곡이었으니. 앙코르에선 또 다른 슈트라우스 가곡을 기대했지만... 물론, 즐기자고 오는 연주회니 이런 열광적인 앙코르도 나쁘진 않았다.
 

 

오늘 황수미는 기술적인 명연기와 세밀한 악보 해석 모두를 깔끔하게 보여주었다. 도이치는 장인다운 반주로 프로그램 전체를 수준 높게 만들었고, 두 사람이 볼프 가곡으로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예술의전당을 감싼 시원한 바람에 어울리는 깔끔한 진수성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