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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더스 평론 13: 풍요로움 (1968년 8월 30일) 풍요로움 (1968년 8월 30일) 슈베르트 피아노 삼중주 내림 마 장조가 울려 펴지던 저녁. 번뜩이는 천재성이 음악을 완성했다. 가슴이 품고 있던 감정이 격하게 떨렸다. 이스토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번쩍이며 흐르는 선율 속으로 태양빛을 불어 넣었다. 그의 강한 제어 덕분에 아르페지오와 화음은 살아 움직였다. 셈여림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산되고 음악이 가진 골격과 연결되었다. 여기에 스턴의 바이올린, 그리고 로즈의 첼로가 현악선율을 덧붙이며 기쁨으로 화답했다. 슈베르트는 어느 때 보다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향기를 품었다. 꽉 짜인 소나타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온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야생화, 비너발트에서 자란 듯 자연 그대로의 우아함을 보이는 음악 속에선 우리가 숭배하는 어떤 음악 형식.. 2015. 2. 26.
카더스 평론 12: 말러가 승리한 이유 -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년 1월 15일) 말러가 승리한 이유 –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년 1월 15일) 1966년 런던 심포니 실황. 수요일 페스티벌 홀. 야샤 호렌슈타인이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 아래 말러는 강력한 승리를 쟁취했다. 나는 많은 9번 교향곡을 들었고, 몇몇은 꽤 유명한 말러리안이 지휘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오늘만큼 악보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적은 없다고 확신한다. 음과 리듬, 팽팽하게 긴장된 현악, 목관의 파토스. 모든 게 시곗바늘만치 정확했다. 금관과 호른은 낭만의 봄바람부터 안치실의 싸늘한 찬바람까지 다양한 소리를 소화했다. 말러의 목소리, 과장 좀 붙여 말러의 유령소리. 어떤 놀라운 최면을 걸었길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낼 수 없었던 그런 소리를 만들었을까. 연주가 끝나자 .. 2015. 2. 23.
카더스 평론 11: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1945년 4월 스튜디오 녹음 그저 삐까번쩍한 솔리스트나 보려고 할레 공연을 찾던 그들이 오지 않았기에 어젯밤 청중은 고요함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기억에 남을 연주로 엘가의 걸작을 들을 수 있었다. 깊은 장면을 일궈낸 모든 예술가들이 그 경험을 자랑스러워 하리라. 말콤 사전트 박사는 그 어떤 때보다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 냈다. 물론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고, 때때로 광활함이 부족해 보였다. 육신 너머의 황홀함, 작은 합창단이 부른 천사들의 탄식으로부터 나와야 할 광활함 말이다. 또한 바이올린은 “O gen’rous love”가 울리는 법열의 순간, 순수한 high E 음을 선보이는데 실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를 잡아 끄는 웅변적인 노래를 보여준 .. 2015. 2. 21.
카더스 평론 10: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951년 10월 23일)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951년 10월 23일) 요제프 크립스, 뉴욕필하모닉.1961년 뉴욕 실황 지난밤 로열 페스티벌 홀. 런던 심포니가 요제프 크립스의 장대한 지휘 아래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숨죽여 네 개의 거대한 악장을 들었다. 8번은 절대 접근하기 쉬운 교향곡이 아니다. 예컨대 7번 교향곡마냥 길게 노래하는 악절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 브루크너는 상승부에서 짧고 하품까지 나는 음형들을 반복시키며 교향곡을 다져나간다. 반복되는 음형들은 금관의 하강 경과구와 조바꿈, 게네랄파우제에 의해 갑작스럽게 끊긴다. 누군가 브루크너를 처음 들었다면 한슬리크의 열변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브루크너는 짧은 반음계 모티프로 곡을 시작한 뒤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무한정 음계를 상승시키며 쭉.. 2015. 2. 17.
카더스 평론 09: 장미의 기사 – 풍성한 삶과 사랑의 감각 (1934년 1월 25일) 장미의 기사 – 풍성한 삶과 사랑의 감각 (1934년 1월 25일) 1933년 스튜디오. 로베르트 헤거와 장미의 기사 3인방. HMV가 고민 끝에 ‘장미의 기사’의 으뜸가는 장면들을 골라 유성기(留聲機)로 옮겼다. 녹음이 빈에서 이뤄졌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슈트라우스의 향취를 품은 ‘그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 연주했음은 물론이다. 가수 또한 완벽했다. 모두가 기다렸을 로테 레만의 원수부인은 영원미를 머금은 채 극 속 아이러니를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창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음성과 더불어 엘리자베트 슈만의 조피는 레코드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사랑 앞에 용감한 옥타비안을 노래한 올셰프스카 역시 빛나는 목소리를 뽐냈다. 허나 불한당 옥스를 그려낸 마이어의 육감적인 연기야말로 유머.. 2015. 2. 11.
카더스 평론 08: 고결한 낭만의 화신 (1947년 3월 26일) 고결한 낭만의 화신 (1947년 3월 26일) 1937년의 클렘페러(좌)와 미국 망명자들. 쇤베르크의 모습도 보인다. 지난밤 클렘페러 박사가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육중했던 대 푸가가 먼저 홀에 울려 퍼졌다.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대 푸가는 콰르텟이 모든걸 쏟아 만들어내는 강렬한 원곡의 무게감에 견줄 만 했다. 클렘페러는 원곡을 훌륭하게 뒤바꿨다. 모든 악기가 놀랍도록 깔끔하게 들렸는데 다이나믹이 세심하게 조절되었기에 가능한 경지다. 거인에서부터 매섭게 휘몰아친 의지 앞에서 음악은 자신의 지평선 너머까지 품어내려는 듯이 보였다. 베토벤은 조성과 짜임새, 리듬으로 씨름하며 거대한 대 푸가 악장을 다듬었다고 여겨졌는데, 반면 클렘페러는 이런 통념들을 경솔한 신성모독이라 .. 2015. 2. 6.
카더스 평론 07: 런던의 새 오케스트라 – 그들의 첫 공연 (1932년 10월 8일) 런던의 새 오케스트라 – 그들의 첫 공연 (1932년 10월 8일) 오늘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퀸즈 홀에서 의기양양하게 첫 삽을 떴다. 토마스 비첨 경이 마침내 자기 악단을 꾸린 것이다. 비첨이 어떤 영국의 오케스트라도 규칙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륙의 음악가들은 놀라곤 했다. 여기 영국은 누군가 주어진 사실조차 질투했을, 그런 천재를 썩혀왔다. 오늘 아침 런던 필하모닉이 세심하게 연습했고, 토마스 비첨 경은 열정적이고 손재주가 많은 연주자들을 마지막으로 손보았다. ‘서열과 연줄이 없는 여기서는 모두가 리더입니다.’ 많은 첼리스트들을 제치고 18살밖에 안된 유망한 청년이 곧 수석이 될 것처럼 말이다. 베를리오즈 '로마의 사육제 서곡', 1936년 11월 스튜디오 녹음 모든 위대한 지휘자들처.. 2015. 2. 1.
카더스 평론 06: 제 4번, 변화의 바람 – 에든버러 축제의 브루노 발터 (1951년 8월 28일) 제 4번, 변화의 바람 – 에든버러 축제의 브루노 발터 (1951년 8월 28일)(네빌 카더스가 ‘맨체스터 가디언’ 런던 주임으로 임명되고 쓴 최초의 글 ) 캐슬린 페리어를 반주하는 브루노 발터. 1949년 에든버러 축제 비 내리는 안식일의 에든버러, 브루노 발터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선보인 브루크너 4번 교향곡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정말 인상적인 해석이다. 탄탄한 근육질이 떠오르는 강건한 음색은 눈길을 끌었다. 브루크너가 가졌을 생각도 풍부하게 그려졌다. 나는 뉴욕 필하모닉이 기교적 효율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상황에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이 브리튼 섬에서 작곡가가 평생 정직하게 썼을 음표를 연주하면 어김없이 구호와 외침이 들린다. ‘영혼이 빠진, 관점 부재의, 냉혈한’ 따위의 이야기 말이다. 비슷.. 2015.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