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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잡설108

카더스 평론 16: 발퀴레 – 비르기트 닐손 (1957년 10월 9일) 발퀴레 – 비르기트 닐손 (1957년 10월 9일) 57년 9월 Opera지 발췌 금요일 “발퀴레” 공연이 있었다. 연주는 악보에 충실했으며, 브륀힐데의 등장이 런던을 뜨겁게 달궜다는 소식이 금새 퍼졌다. 비르기트 닐손은 명료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지녔으며 때론 청자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수려한 외모는 덤이다. 약간의 연륜만 더 쌓인다면 지금에 비해 훨씬 심원한 저음을 들려주리라. 닐손은 이미 사려 깊은 성악기교를 구사하며, 보탄이 그녀를 벌하던 뛰어난 장면이 그러했다. “O sag’ , Vater! Sieh mir ins Auge”에서 닐손은 파토스를 밑바닥부터 자연스럽게 끌어냈으며, 지금 없애려 하는 벨중을 창조한 건 보탄 당신이라고 알려주는 “Du zeugtest ein edles Geschlec.. 2015. 3. 6.
카더스 평론 15: 라인의 황금 – 정렬과 균형에 대한 켐페의 감각 (1957년 9월 27일) 라인의 황금 – 정렬과 균형에 대한 켐페의 감각 (1957년 9월 27일) Opera지 1957년 9월호 수요일 밤.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가 또 다른 “반지”를 보여주기 위해 바닥을 치우고 새 단장을 했다. 바그너의 장대한 4부작. 신성에 대한 염원과 권력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영원한 갈등. 갈등의 중심에서 피어나는 도덕 법칙은 고귀한 피조물과 그들의 세계까지 자기 방식대로 깨뜨린다. 약동하고 증폭되는 시원(始原)의 동력이 “라인의 황금”의 세계를 힘껏 열어재낀다. 전주곡의 첫 E-flat 화음은 깊은 곳에서 물 흐르듯이 피어오르며, 모든 게 시작된다. 여기 피트에서 조화로운 우주의 원형질이 솟아오른다. 모든 분노와 법열, 다가올 종말의 시발(始發)이다. “반지”는 오케스트라에게 모.. 2015. 3. 3.
카더스 평론 14: 바그너에 대한 상념 (1955년 6월 4일) 바그너에 대한 상념 (1955년 6월 4일) 1957년 실황(테스타먼트반) BBC 덕분에 런던 밖에 사는 많은 이들이 코벤트 가든의 연례 “반지” 공연을 감상 할 수 있게 되었다. 방송국에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수 없이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반지”의 진수를 깨닫지 못한 채 집에서 평생을 보냈다는 게 아닌가. “반지”는 실제로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다. 바그너 마법은 전혀 깨지지 않았으니. 바쁜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열광적인 청중이 전 세계에 퍼져 있고 그들은 바그너가 말하는 터무니 없는 헌신을 몸소 실천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라. “저녁식사? 집어치워. 일찌감치 일에서 손떼고 여기, 어둠으로 뛰어와. 그 속에 앉아 음표, 나아가 단어, 단어, 또 단어에 귀를 기울.. 2015. 3. 1.
카더스 평론 13: 풍요로움 (1968년 8월 30일) 풍요로움 (1968년 8월 30일) 슈베르트 피아노 삼중주 내림 마 장조가 울려 펴지던 저녁. 번뜩이는 천재성이 음악을 완성했다. 가슴이 품고 있던 감정이 격하게 떨렸다. 이스토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번쩍이며 흐르는 선율 속으로 태양빛을 불어 넣었다. 그의 강한 제어 덕분에 아르페지오와 화음은 살아 움직였다. 셈여림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산되고 음악이 가진 골격과 연결되었다. 여기에 스턴의 바이올린, 그리고 로즈의 첼로가 현악선율을 덧붙이며 기쁨으로 화답했다. 슈베르트는 어느 때 보다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향기를 품었다. 꽉 짜인 소나타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온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야생화, 비너발트에서 자란 듯 자연 그대로의 우아함을 보이는 음악 속에선 우리가 숭배하는 어떤 음악 형식.. 2015. 2. 26.
카더스 평론 12: 말러가 승리한 이유 -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년 1월 15일) 말러가 승리한 이유 – 야샤 호렌슈타인과 위대한 9번 교향곡 (1957년 1월 15일) 1966년 런던 심포니 실황. 수요일 페스티벌 홀. 야샤 호렌슈타인이 지휘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 아래 말러는 강력한 승리를 쟁취했다. 나는 많은 9번 교향곡을 들었고, 몇몇은 꽤 유명한 말러리안이 지휘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오늘만큼 악보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적은 없다고 확신한다. 음과 리듬, 팽팽하게 긴장된 현악, 목관의 파토스. 모든 게 시곗바늘만치 정확했다. 금관과 호른은 낭만의 봄바람부터 안치실의 싸늘한 찬바람까지 다양한 소리를 소화했다. 말러의 목소리, 과장 좀 붙여 말러의 유령소리. 어떤 놀라운 최면을 걸었길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낼 수 없었던 그런 소리를 만들었을까. 연주가 끝나자 .. 2015. 2. 23.
카더스 평론 11: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제론티우스의 꿈 (1939년 2월 10일) 1945년 4월 스튜디오 녹음 그저 삐까번쩍한 솔리스트나 보려고 할레 공연을 찾던 그들이 오지 않았기에 어젯밤 청중은 고요함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기억에 남을 연주로 엘가의 걸작을 들을 수 있었다. 깊은 장면을 일궈낸 모든 예술가들이 그 경험을 자랑스러워 하리라. 말콤 사전트 박사는 그 어떤 때보다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 냈다. 물론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고, 때때로 광활함이 부족해 보였다. 육신 너머의 황홀함, 작은 합창단이 부른 천사들의 탄식으로부터 나와야 할 광활함 말이다. 또한 바이올린은 “O gen’rous love”가 울리는 법열의 순간, 순수한 high E 음을 선보이는데 실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귀를 잡아 끄는 웅변적인 노래를 보여준 .. 2015. 2. 21.
카더스 평론 10: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951년 10월 23일) 브루크너 교향곡 8번 (1951년 10월 23일) 요제프 크립스, 뉴욕필하모닉.1961년 뉴욕 실황 지난밤 로열 페스티벌 홀. 런던 심포니가 요제프 크립스의 장대한 지휘 아래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숨죽여 네 개의 거대한 악장을 들었다. 8번은 절대 접근하기 쉬운 교향곡이 아니다. 예컨대 7번 교향곡마냥 길게 노래하는 악절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 브루크너는 상승부에서 짧고 하품까지 나는 음형들을 반복시키며 교향곡을 다져나간다. 반복되는 음형들은 금관의 하강 경과구와 조바꿈, 게네랄파우제에 의해 갑작스럽게 끊긴다. 누군가 브루크너를 처음 들었다면 한슬리크의 열변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브루크너는 짧은 반음계 모티프로 곡을 시작한 뒤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무한정 음계를 상승시키며 쭉.. 2015. 2. 17.
카더스 평론 09: 장미의 기사 – 풍성한 삶과 사랑의 감각 (1934년 1월 25일) 장미의 기사 – 풍성한 삶과 사랑의 감각 (1934년 1월 25일) 1933년 스튜디오. 로베르트 헤거와 장미의 기사 3인방. HMV가 고민 끝에 ‘장미의 기사’의 으뜸가는 장면들을 골라 유성기(留聲機)로 옮겼다. 녹음이 빈에서 이뤄졌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슈트라우스의 향취를 품은 ‘그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 연주했음은 물론이다. 가수 또한 완벽했다. 모두가 기다렸을 로테 레만의 원수부인은 영원미를 머금은 채 극 속 아이러니를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창의 전형이었다. 그녀의 음성과 더불어 엘리자베트 슈만의 조피는 레코드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사랑 앞에 용감한 옥타비안을 노래한 올셰프스카 역시 빛나는 목소리를 뽐냈다. 허나 불한당 옥스를 그려낸 마이어의 육감적인 연기야말로 유머.. 2015. 2. 11.